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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영 회장의 생활칼럼 시즌3] 7탄- 아들(다니엘)의 중국공장 생활 위클리홍콩 2022-06-03 11:00:14

비즈니스맨으로 창업을 한 경우에 가업으로 본인이 일구어놓은 사업체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대부분의 창업을 해본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생각일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딸아이가 전문직인 의사로 직업을 선택하였으니 아들이 아비의 터전을 물려받아서 더욱 발전시켜 가기를 마음속으로 은근히 원하였다.


홍콩의 몽콕 시장에서 한사람으로 시작하여 약1,700명의 공장 식구와 홍콩 본사의 약50여명의 식구로 발전하기까지 오직 앞만 보고 일에만 열중하다 보니 후계자라는 단어가 아직은 생소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일찍부터 아들을 훈련시키고 싶었다.


창업 후 처음 1년간은 혼자서 핸드폰 한 대로 사업을 해야 했고, 겨우 2년 차에 직원 한 명을 채용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나의 비서로 처음 입사한 여사원이 현재 회사의 사장(總經理)이 되었으니 신식교육을 받은 자식이 보기에는 너무나 폐쇄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들이 영국의 명문대 UCL(University College London)을 졸업하고 아빠의 공장에서 일해보겠다고 하니 마음속으로 무척 흐뭇하였다.

 

다니엘군의 런던대학교(University College London) 졸업식에 참석한 필자부부

공장 근무를 결심한 아들과 공장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쉽지 않은 도전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나는 공장 안에 조그마한 숙소를 지어서 24시간 공장 안에서 근무하고 생활하는 상태였다. 물론 숙소는 간단한 조립식 건물로 샤워장과 침대 외에는 별다른 생활 편의시설이 없었다.  아들은 공장에서 한방에 기거하고 비서로서 같이 업무를 하면서 궂은일도 기꺼이 감당하였다. 나름 계속되는 생산 회의와 구매, 안전, 수출, 대정부 기관 일 처리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특히 중국어(만다린)가 능통하였으니 공원과 관리자와의 소통을 담당하여 공장 근무를 잘하였다. 하루에 한 번 공장 전체의 부서별 작업자와 인사만 하고 돌아다녀도 한 시간이 걸리는 넓은 현장 구석구석의 관리감독에 야간에도 잠자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눈코 뜰 새 없는 일과였다. 또한 공장 관련일 외에도 세계 각국의 바이어와 시차를 감안하여 서로 연락해야 했다. 미국 바이어와의 연락은 대부분 새벽 시간, 유럽 바이어와의 연락은 초저녁에 시작해야 하니 아예 야간에 공장 순시를 아들과 같이하는 날에는 낮에서야 잠깐 눈을 붙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야말로 올빼미 같은 생활이었다. 매일 공장에서는 3교대로 공원들이 밀려드는 오더를 처리하느라 바쁜 나날이었으며, 관리자들도 생산관리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보람공장 앞에서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다니엘군(오른쪽에서 4번째)

사장이 공장에 24시간 근무하는 상황이니 공장장 이하 주요 간부들이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아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아들의 고된 공장 생활을 아비로서 옆에서 지켜보며 나의 군대, 직장생활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어려웠던 일들과 비교해보면서 아들에게는 별문제가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아들이 불면증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공장에 설치된 3대의 3,000톤 프레스가 야간작업을 할 때면 엄청난 진동과 소음으로 숙소에서 자고 있던 아들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많은 오더를 확보하여 매일 야간작업을 늦게까지 하게 된 경우라 매일 계속되는 진동과 소음이 아들에게는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당시 오더가 넘쳐나서 공장이 24시간 운영되니 너무나 기쁜 마음에 진동과 소음도 '자장가'로 들려서 단잠을 자는 나로서는 아들의 불면증을 이해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아들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모든 일을 지시하였고 정신력이 아직 강하지 못하다고 질책하였다. 이런 강압적인 아비의 관리방식에 지친 아들은 공장 생활의 흥미를 점점 잃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내와 아들의 눈에는 아무리 피고용자라 할지라도 수면시간마저 편하게 해주지 못하는 악덕(?) 고용주로 낙인찍히게 된 것이다.

 

한편 일주일 동안 매일 공장에 파묻혀 일만 하는 아들에게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토요일에 일찍 일을 마치고 홍콩에 나가서 친구들과 마음껏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요구는 가능한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번번이 출발시간이 늦어지거나 교통체증으로 늦어져 아들이 막상 홍콩에 도착해서는 친구들과의 시간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리하여 한창 젊은 나이에 계속 스트레스로 쌓이게 되었다.


아들은 제조업이 아닌 금융권에 근무하는 다른 직업을 가진 친구들을 동경하게 되었다. 점점 아빠가 하는 회사와 제조업에 대한 환경에서 탈피하고 싶어 했다. 마치 전쟁터에서 생사를 다투는 전투를 매일 해야 하는 평생직업을 아빠로부터 물려받지 않고 공장에서 탈출하려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 되었다.


결국 아들은 아빠의 공장일을 그만두고 꿈에 그리던 금융회사에 취업하게 되었고, 많은 주위 친구들이 좋다고 했던 월급 생활을 열심히 해본 후에 본인의 적성에 맞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또한 IT 관련회사로 근무지를 바꾸어 본 후 직장생활을 끝내고 창업을 선택하였다. 엄마를 설득하여 자본금을 지원받아 중국 동관과 선전(深圳)에서 영어학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유창한 중국어로 영어학원의 교과과정을 프레젠테이션하고 있는 다니엘군 

원래 아들은 엄마를 닮아서 남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한동안 상당히 좋은 평판의 학원을 경영하였으나 중국 정부의 사교육 금지정책과 코로나로 지금은 학원 사업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 같다.

 

오늘도 아비는 항상 유명한 성경의 이야기인 '탕자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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