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전설적인 쿵푸스타' 이소룡 탄생 70주년을 맞은 11월 27일, 이소룡(李小龍)의 마지막 연인 딩페이(丁珮·65)가 입을 열었다.
1973년 7월 대만 출신 여배우 딩페이의 자택에서 혼수상태로 발견된 이소룡의 사인을 둘러싸고 진통제 부작용과 병사, 암살, 복상사 등 갖은 억측과 소문이 지금까지도 계속 끊이지 않고 있다.
딩페이는 홍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소룡이 죽기 1년 전인 1972년 유부남인 그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딩페이는 자신의 집에서 이소룡이 정신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간 이래 줄곧 그의 죽음에 직접 관여했다는 의혹에 시달려 왔다고 토로했다.
그는 "세간에는 내가 그를 살해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지만 그냥 웃어넘기려 한다"면서도 "이소룡은 운명을 달리하기 전 나를 찾았을 뿐이다. 세상 모두가 이상하게도 나를 저주하는 것 같다"고 괴로운 심경을 털어놨다.
딩페이는 자신과 이소룡을 연결해준 사람이 골든하베스트(嘉禾)의 레이몬드 초(鄒文懷) 회장이라는 사실도 공개했다.
레이몬드 초 회장의 소개로 만난 당일 이소룡은 식탁 밑으로 딩페이의 손을 꽉 잡고 그의 눈을 응시하면서 프러포즈해 와 바로 열애하는 사이가 됐다고 한다.
또한 딩페이는 운명의 날에 대해 "7월20일 오후 이소룡과 레이몬드 초 회장이 구룡(九龍)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 함께 왔고, 내가 여주인공을 맡은 '사망유희'를 놓고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이소룡이 두통을 호소해 그가 전에도 먹던 진통제 한 알을 주었다. 그가 침실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초 회장과 거실에서 계속 영화대본에 관해 대화했다. 초 회장이 약속 때문에 먼저 떠난 뒤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저녁식사 약속 때가 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초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밤늦게 우리 집에 와서 파티를 하겠다며 계속 자도록 놔두라고 했다. 나중에 다시 그를 깨우려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놀라서 초 회장에게 전화했고 황급히 달려온 그가 의사를 불렀지만 소용이 없어 병원으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딩페이는 사고 후 이소룡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던 이유로 "그때 난 26살에 지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만큼 충격을 받아 차분한 성격의 초 회장이 시키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초 회장과 이소룡의 부인 린다도 그의 이미지를 보전하기 위해 사고 현장을 카울룬통(九龍塘) 자택이라고 둘러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언론과 팬들은 자신이 이소룡을 죽음으로 몬 장본인이라고 지목하며 살해 위협까지 해와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생전에 이소룡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내가 죽을 때(When I Die)'였다고 한다. 그가 죽기 전 그토록 열심히 영화를 찍었던 건 살아 있는 동안 가능한 많은 작품을 남기길 원했기 때문이라고 딩페이는 덧붙였다.
이소룡의 돌연사로 딩페이는 결국 은막을 떠났으며 홍콩 영화계의 거물 Charles Heung (向華强)과 결혼해 딸 하나를 낳은 후 이혼했다.
1940년 11월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이소룡은 1971년 첫 주연작 '당산대형'을 시작으로,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가 연속 대히트를 치면서 월드스타로 떠올랐으나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유작 '사망유희'는 대역배우를 써서 촬영을 마친 뒤 1979년 개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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