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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현장 속에서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5-12-22 11: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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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8호, 12월23일]   한 바탕 몸살을 앓고 난 홍콩은 다시 불을 밝히며 휘황찬란한 밤의 도시로 빠져든다.  꺼..
[제108호, 12월23일]

  한 바탕 몸살을 앓고 난 홍콩은 다시 불을 밝히며 휘황찬란한 밤의 도시로 빠져든다.  꺼졌던 크리스마스 트리의 작은 전등이 쉴 새 없이 반짝이고, 굳게 내려졌던 완짜이와 코스웨이베이의 상가 문들이 활짝활짝 열려져 있다.

  긴 긴 잠을 잤고, 또 많은 꿈을 꾸었던 듯 요 며칠이 그렇다.  어제 저녁 밤을 꼬박 새워 일하고 아침에야 잠깐 눈을 붙였다.  멀리서 어렴풋이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받을 정신도, 기력도 없어 전화 받기를 포기하고 잠시 외부세계로 끌려나왔던 나를 이끌어 다시 잠 속으로 스르르 빠져드는데 다시 전화벨 소리가 나를 다시 잡아끌었다.

  무더기로 잡혀 들어갔던 우리 농민과 시위자들이 대거 풀려났고, 11명이 기소돼 경찰에 잡혀있다는 것이다.  16명 중에는 여러 차례 전화통화로 근황을 알아왔던 한 분도 계시다는 소식이었다.  가슴이 착잡해져 왔다.  복잡하고 허망한 꿈이길 바랐는데, 11명 이라는 기소자를 현실 앞에 데려다 주고 꿈은 WTO라는 무형의 이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WTO 폐막을 하루 앞둔 17일, 빅토리아 공원으로 달려갔다.  전철역부터 골목 구석구석까지 진을 치고 있는 홍콩경찰들로 인해 코스웨이베이는 더 한층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공원 앞에 있던 경찰에게 시위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한 팀은 센트럴로 이동했고, 800여명은 공원에 모여있다고 친절하게 안내해 줬다.  

  빅토리아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보였던 시위대는 일본에서 온 30여명의 원정대였고, 그 옆에서는 필리핀에서 온 원정대들이 무대를 세워놓고 고통 받는 농민을 그린 연극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한국 농민들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급히 반대방향으로 가보니 멀리서 ‘깨부수자.... 저지하자.... ”는 여자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짜랑짜랑하게 들려왔다.  그곳에 한국인 농민 원정대 1천 여명과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온 원정대 200여명이 앉아 시위 주최 측으로부터 그동안의 경과와 성과, 오늘 어떻게 WTO를 박살 낼 것인가에 대해 설명을 들으며 기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사물놀이패 그리고 상여
  시위대는 한국 사물놀이패가 앞장서고, WTO를 장사지낼 상여 부대가 뒤를 잇고, 그 뒤로 동남아 시위대가 따라오기로 했다.  북, 징 괭가리 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위에 있던 홍콩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어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괭가리 소리가 한층 신기를 발휘해 사람들의 발걸음을 점점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소고백화점 앞을 지날 무렵 시위대는 몰려드는 시민들을 위해 한 바탕 우리 가락을 들려주고 깊숙이 인사를 하자 박수소리와 환호소리가 들려왔다.  시위대 주위로 점점 홍콩 경찰의 숫자도 늘어가고, 시위자들 보다 더 많은 기자단들로 인해 시위대열이 흐트러지자 시위대는 우리를 바깥으로 내 쫓으려 했지만 쉽게 물러설 기자들이 아니다.  

  상여에 꽂혀있는 노자 돈도 국제적인 도시 홍콩에 오니 미국달러, 홍콩달러, 한국원 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외신기자들이 농민들을 향해 무슨 이유에서 돈을 꽂았는지 물었지만 못 알아듣는다고 손만 휘휘 저어, 옆에서 보고 있던 내가 저세상으로 가는 노자 돈이라고 설명해 줬다.  다름부터 이 기자는 나만 졸졸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물어오며 통역해주길 바랬다.

  코스웨이베이를 지나 완짜이에 다다랐다.  컨벤션 센터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 갈수록 경찰의 숫자가 배로 늘어갔다.  홍콩 시민들의 표정, 뜨거운 호응, 우리 농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으려 노력하고 있는 사이 역사 현장은 전쟁 속으로 돌입하고야 말았다.

최루탄, 최루액 그리고 전기곤봉
  뒤에서 와 하는 함성소리와 함께 농민들이 앞으로 치달았고, 앞에서는 경찰들이 방패와 곤봉을 들고 우리쪽으로 들이밀고 들어왔다.  농민이고 기자고 경찰이고, 통역요원이고 모두가 다 아수라장 속에 빠져서 허우적댔다.  그들에게 휘말려 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대면서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순간 작은 틈이 생겨 사력을 다해 인도 쪽으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경찰들이 누런색의 최루액(겨자가루)을 쏴댔다.  고글을 쓴 사람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맨얼굴로 겨자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하고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옆에 있던 동료들이 물을 얼굴에 들이붓는데 다시 겨자가루가 날라들었다.  

  한 농민이 긴 대나무를 구해 경찰을 향해 냅다 날리니 경찰들이 한 겹 더 현장을 둘러치며 그를 향해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악을 써댔다.

  여기서 끝나는 줄 알았다.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시위대들은 조직력을 발휘해 느슨해진 다른 경로를 통해 컨벤션센터 쪽을 전진하고 있었다.  모두 다 후퇴하기 시작하는 듯 하더니 뚫려진 그곳으로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고, 경찰과 다시 맞붙었다.

  옆에 있던 농민이 경찰의 전기곤봉에 맞고 쓰러지더니 일어날 줄 몰랐다.  한참 만에 일어선 그를 병원으로 가자고 말해도, 그러다 경찰에 잡혀가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죽어도 이대로 있다 죽는게 낫다고 말했다.  잠시 후, 갑자기 눈앞이 번쩍 거렸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눈이 빠질듯 아파오고 목이 옥죄어 오는 고통을 느끼며, 최루탄을 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농민들은 다시 후퇴했다.

  곁에 있던 홍콩 시민들이 홍콩 경찰을 향해, 농민들에게 너무 심한거 아니냐고 악을 써댔다.  농민들은 다시 다른 길로 ‘WTO’를 저지하기 위해 아 나섰다.  점점 어둠이 깊어갔다.  바람은 점점 차가워지고 농민들은 지쳐갔다.  수천명의 홍콩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홍콩 시민들의 따뜻한 손길 그리고....홍콩 경찰들
  홍콩 시민들이 여기저기서 먹을 것들이 사들고 나타났다.  빵을 건네는 고사리 같은 소년이 있는가 하면 물을 박스로 사 들이밀고 사라지는 사람도 있었다.  농민들은 빵이며 과자를 어구적우구적 씹어 먹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홍콩 시민들과 잠시 인터뷰를 가졌다.  한국농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불쌍하다고 답했고, 어떤 이들은 한국인들의 파워가 느껴진다고, 한국인들이 멋있다고도 했다.  어떻게든 한국 농민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모든 이들이 다 좋게 말하지만은 않았다.  어떤이는 중간 손가락을 높이 지켜 올리며 한시라도 빨리 돌라가라고 입을 이죽거리기도 했다.

  홍콩 경찰들.  평소와는 다르게 긴장감과 공포감에 사로잡힌 그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또 재밌기도 했다.  이런 마음은 홍콩시민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니다 나보다 한 술 더 떠 구경거리라도 된 듯 사람들이 몰려와 그런 경찰들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한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오더니 경찰에게 모델에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어이없게도 그 경찰은 그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 같이 기념 촬영을 했다.  보고 있던 나는 눈이 아픈 줄도, 목이 아픈 줄도, 밤이 늦도록 물 한 모금 못 마셔 지칠 대로 지친 줄도 모르고 그들을 보며 흐흐대고 있었다.

어떻게 왔을까?
  한 농민아저씨는 홍콩교민인 나를 보자 신기한지 시위할 생각은 안하고 얘기만 했다.  전라도 나주에서 왔다는 그분에게 어떻게 홍콩까지 오게 됐느냐고 묻자, 전국농민회 소속인 농민들이 왔으며, 전국에서 다 모였다고 했다.  그중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많이 왔고, 여기까지 오는 경비는 1인당 100만원 정도 한단다.  그 돈의 50%는 농협에서, 40%는 각종 단체에서 후원을 했기 때문에 본인은 10%만 내고 왔다고.  그러나 전국이 다 같을 수는 없을 거라는 얘기다.  

  그 분은 들어보지도 못한 캠프장에서 묵고 있는데 물도 안 맞고 음식도 안 맞아 죽을 지경이라고 하소연을 했다.  다행히 이제는 식당에서 도시락을 배달해 먹어서 그나마 낫다고.  그런데 아침은 캠프장에서 주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어제 아침엔 양고기 볶은 게 나와서 먹었더니 그거 먹은 사람들이 다 배탈이 났다고.  식중독이 아닌가 싶다.  농민들은 그것도 모르고 모두 배탈 약을 한꺼번에 먹었더니 다들 차도가 있어 다시 모여 빅토리아 공원으로 나왔다고 했다.

  시위대에서 선창을 하는 사람은 홍콩의 지리를 꽤 잘 알고 있었고, 영어도 광동어도 어느 정도 하는 듯 보였다.  홍콩시민들에게 우리와 동참해 달라며 영어구호를 외쳤는데, 시위자들은 발음만 비슷하게 해서 따라 외쳤다.  

  시위대에 있던 순박한 농민들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여기가 어디메쯤 되는지, 내가 외치는 한 마디 영어구호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컨벤션으로 가는 완짜이 언덕길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밤이 점점 깊어지고, 구경하던 홍콩 시민들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었다. 찬 바닷바람이 농민들의 옷깃 속으로 파고들었다.  농민들은 오늘 밤은 철야농성을 할 것이라며 홍콩시민들이 건네준 빵과 과자, 생라면을 팩소주와 함께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거기에 두고 홀로 발길을 돌려 따뜻하고 아늑한 내 보금자리로 들어왔다.  

무엇을 이루었을까?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간 홍콩에는 우리 정부와 홍콩정부간에 처리해야 할 숙제거리들이 산재해 있고 우리들의 이목은 다시 이곳에 집중돼 있다.  모쪼록 기소돼 있는 그들 모두 무사히 가족들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농민들이 구속되고 수감되던 중 홍콩경찰로부터 인권침해를 당했다는 우리 여성들의 가슴 아픈 얘기가 오늘 아침 전화선을 통해 들려왔다.

  여성농민들은 수갑을 찬 채 화장실을 봐야 했다.  홍콩 경찰이 속옷까지 다 벗겨주고 입혀줬고, 일을 보는 동안 화장실 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다.  

  홍콩경찰은 또 4-5명을 수용할 수 있는 좁은 공간에 26명이나 되는 여성농민을 한꺼번에 밀어 넣었고, 추운 날씨였음에도 불구, 찬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거나 덮고 잘 모포도 제공하지 않고 비안간 적인 대우를 하며 잡아 두었다.

  어떤 여성은 이유 없이 경찰의 곤봉으로 맞았다고 하고, 또 어떤 여성은 구둣발로 채이고 손으로 얼굴을 맞았다며 하소연하기도 했다.

  WTO 체제가 빈국의 시장개방을 강요해 결국 노동자와 농민들을 더욱 빈곤하게 만든다며 반 WTO 구호를 결렬하게 외치다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돌아간 그들이 홍콩에서 이루고 간 것은 무엇이고,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것은 무엇일까?

<로사 / rosa@weeklyh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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