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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와 함께 떠나는 남도 기행 (6) - 길이 시작되는 곳, 땅 끝 마을 해남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6-07-20 1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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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4호, 7월21일]   나이 많은 광주 남정네에게 시집와서 10여년을 살았다는 후배는 걸쭉한 입담으로 끝도 없이 수다를 떨다 새..
[제134호, 7월21일]


  나이 많은 광주 남정네에게 시집와서 10여년을 살았다는 후배는 걸쭉한 입담으로 끝도 없이 수다를 떨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여행 가방 깊숙이 들어있던 '로마 이야기'를 꺼내든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추운 겨울, 알프스산맥을 넘은 정예부대와 함께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철옹성 같던 로마를 향해 치닫는 카르타고군의 함성소리가 자유민주주의 쟁취를 외치던 민중들의 함성소리와 오버랩 되어 내 정신은 더욱 산란해진다. 설핏 잠이 드는가 싶더니 모닝콜이 쩌렁쩌렁 울린다.  짐을 주섬주섬 챙겨 넣고 나는 다시 길을 나선다.





  오늘은 말로만 듣고 책에서나 보던 그 막연한 땅. 육지의 끝절, 땅 끝으로 가는 날이다.  북위 34도 17분 38초.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그곳.  전남 해남은 육지의 끝을 품은 또 다른 극점이다.  얼마나 가야 나오려는지 차는 쉴 새 없이 달린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이 과거 속으로 사라져가고, 끝없이 펼쳐진 마늘 밭에서 굽어진 허리를 두드리며 한 숨 돌리는 시골아낙의 모습을 보는 순간, 노인들만 남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을 친정 부모님이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허름한 농가, 마치 바다 속에 심겨져 있기라도 하듯 아기자기하게 널려져 있는 섬들의 무리가 휙휙 소리를 내며 스쳐갈 무렵 차의 엔진소리가 멈춘다.  눈앞에 '땅끝 마을'이라고 쓴 비석과 함께 해안선이 희뿌연 선을 아늑하게 긋고 있다.  국토의 끝에 와 있다는 미묘한 떨림을 느끼게 하는 해남 땅끝  땅끝 마을, 호수 같은 바다와 보석 같은 섬들로 둘러싸이고 핏빛 황토의 들판이 출렁이는 넉넉한 땅.  일상에 지치고 체념에 스러져 맥없이 떠밀려 온 벼랑.  



  끝은 낯설음이요 두려움이다.  하지만 막상 더는 갈 수 없는 그 곳에 서면 드디어 멈춰 있던 내 안의 꿈틀대는 또 다른 에너지와 만난다.  끝은 반동(反動)의 생명력을 불어 넣는 곳이다.  더는 갈 수 없음이 다시 시작할 눈을 뜨게 해 줘 이 뭍의 끝자락은 다시 뭍으로 향한 출발점이 된다.  질박한 아름다움이 숨 쉬는 해남, 생명의 싱그러움이 꿈틀대는 땅 끝.  그래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구나.  그 임계점으로.


그 섬에 가고싶다, 보길도

  소설가 임철우의 소설 '그 섬에 가고 싶다'의 무대였던 바로 그 섬 보길도를 가기 위해 우리는 배에 올랐다.  사람뿐만 아니라 버스와 트럭까지 실어 나르는 커다란 배에 올라탄 후 자리를 잡기위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 누워있는 아줌마, 아저씨, 노인네들, 옹기종기 모여 고스톱을 치는 여행객들.  아니 세상에, 배가 어떻게 온돌로 되어 있느냔 말이다.  홍콩에 있는 스타페리나 라마, 란타우섬 등으로 가는 배를 생각했다가 널따랗게 자리한 온돌방에 어안이 벙벙해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가이드 아저씨 케빈은 플라스틱통으로 된 베개를 가져다 여느 여행객들처럼 벌러덩 눕는다.  방바닥은 설설 끓고 있었다.  히야, 그러나 저러나 이렇게 설설 끓는 방바닥이 얼마만이냐.  미국에서 온 젊은 교포아줌마도 에라, 모르겠다며 슬슬 눕더니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 없다고, 나더러 자꾸 같이 눕자고 성화를 댄다.  못이기는 척 누워보니 천국이 따로 없다.  파도에 따라 이리저리 쿨렁이는 배에 이따금씩 울리는 뱃고동 소리, 설설 끓는 방바닥, 그 아주머니와 나는 이참에 뼈속까지 스며든 객지바람을 몰아내기라도 할양 방바닥에 허리를 대고 열심히 지져댄다.  

  어느 정도 지났을까, 바람을 쐴 겸 가판대로 가보니 배는 어느새 한적한 시골마을 같은 보길도에 다다라 있다.  보길도는 자연의 빼어난 풍광과 정취도 넘치지만, 고산문학을 낳은 문화유적지가 있어 사람들의 사랑을 더 받는다.  

  보길도 청별 선착장에 내려 세연정으로 가기 위해 15분 정도를 걸으면 부황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까지 가는 길목에 오솔길 분위기를 내는 나무로 된 새 길이 생겼다.  나같이 걸어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길 옆의 숲과 계곡, 돌담길 하다못해 폐가까지도 정겨워 긴 여정의 고단함과 피곤함까지 잊는다.



  세연정은 고산 윤선도가 병자호란 때 '왕을 호위하지 않았다'하여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7년 이곳에 들어온 뒤 1671년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드나들면서 13년 동안 산 곳이란다.  세연정 입구 동쪽 축대 밑에는 세연지에서 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연못이 있다.  인공미와 자연미가 만나 빚어낸 풍경은 신선의 놀이터 같고, 너럭바위들은 휘휘 하늘의 구름처럼 날고 들길에 확 핀 꽃잎 같다.

  세연정(洗然亭)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유쾌한 뉘앙스를 준다.  세상과의 인연을 씻어주는 정자라..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궂은 비 멈춰 가고 시냇물이 맑아 온다 / 배 띄워라 배 띄워라 / 낚싯대를 둘러메니 깊은 흥이 절로 난다 /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 산수의 경계를 그 누가 그려낸고 /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중에서)

  그러나 저러나 보길도에서 볼거리는 세연정이 다는 아니라는데, 낙서재, 옥소대, 백도리의 송시열 글씨바위, 흑자갈 예송해변 등 볼거리가 많다던데, 특히나 나는 고산이 '오우가(五友歌)'에서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라고 읊던 예송해변을 방문해 까만 조약돌을 꼭꼭 밟으며 걸어보고 싶었는데, 우리는 왜 이 아까운 시간에 선착장에 앉아 2시간여를 죽여야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워 죽을 지경다.

  아, 나는 다시 그 섬에 가고 싶다.

<글 : 로사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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