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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한인70년사] 제 2-2장. 격동기(군사 정변- 월남전 직후, 1960-1970)
  • 위클리홍콩
  • 등록 2023-01-20 11:30:35
  • 수정 2023-03-13 01: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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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격동기 (군사 정변- 월남전 직후, 1960-1970)


3. 교민 회관 건립 운동


한인회 초기 회관·Causeway Bay Paterson Street, Fair View Mantion, Flat, 4/F, 1962-1970

교육 사업은 교민 사업으로 확정되었으나 숙원이던 교민 회관 문제는 그대로 숙제로 남아 있었다. 홍콩에는 세계 각국의 국민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에게는 저마다 회관이 있었으나 우리는 항상 주점이나, 식당에서 모였고 자라나는 2세들에게는 모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책상 하나를 놓을 수 있는 자리가 없어서 허덕이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몇몇 뜻있는 분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회사 명의로 교민 회관 확보를 위해 기부금을 모았고 넉넉하지 못한 생계를 유지하던 교포들이었지만 주머니를 털어 푼푼이 기부금을 내었고 모국에서 내향하는 여행자들에게도 기부금을 받아 모은 돈이 미화 5,000불에 달하게 되었으나 그 소액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미화 20,000불만 있으면 협소하지만 그런대로 회관 간판을 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외무부를 통하여 자유당 정부에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미화15,000불의 정부 보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자유당 정부로부터 끝내 회답을 받지 못하고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던 것이다.


이때 정일형 외무부 장관이 마닐라에서 개최되는 4개국 외상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홍콩에 잠깐 방문한 기회를 활용하여 교민 회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지나간 경위와 교육 사업 등 시급한 현황을 설명했던바, 진정서를 제출하라는 언질을 받고 즉시 외무부를 통하여 정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정 장관이 귀국 후 미화 20,000불의 정부 보조가 확정되어 그 집행을 기다리는 중에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보조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끈질기게 세 번째의 진정서를 제출하여 당시 최문경 총영사를 통하여 미화 10,000불의 정부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이미 모금되었던 5,000불을 합하여 미화 15,000불이 확보되어 당시의 환율 6:1로 환전하여 홍콩달러 90,000불의 자금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2년 Causeway Bay Paterson Street의 Fair View Mantion, Flat, 4/F를 홍콩달러 88,000불로 교민 회관을 구입하였고, 1월부터는 사용 용도를 확대하여 한국 회관(Korean Club)이란 이름으로 회원제인 한국식당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구입한 회관은 주택으로 설계된 아파트였기 때문에 내부구조 변경, 수리 비용 등이 소요되었고 부동산 소유권에 대한 법적 절차를 취하고 나니 자금이 부족하였다. 교민들은 또다시 자금을 마련하여 정식으로 “홍콩 한국교민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이것이 1998년까지 계속되어오다 매각된 “코리언 클럽”이며 교민회 재산을 처음으로 형성한 것이다. 한국무역협회가 1970년 3월 코리아센터를 설립함에 따라 1970년 11월 19일 코리아센터로 교민회 사무실과 한국 학원을 이전하였다.

 

4. 노동자 폭동



1967년 5월의 중국 문화혁명의 물결이 홍콩에도 미쳤다. 1967년 노동자 폭동이 일어나 몇 달 동안 매일 큰 시위와 소요가 벌어지고 홍콩의 사회질서는 불안해져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많은 자본이 홍콩에서 빠져나가고 경기는 침체되었고, 부동산 경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홍콩섬 쪽으로 이전하였고 구룡에 있던 부동산은 헐값에도 팔리지 않았다. 그 혼란 중에 김복만 태권도 사범은 총독 보디가드로 활약하기도 했다.


<홍콩한인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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