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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한인70년사] 제5-2장 I 한국국제학교설립(1994-1997)
  • 위클리홍콩
  • 등록 2023-04-21 10:28:14
  • 수정 2023-04-21 12: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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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국제학교신축설립



1989년 홍콩정청 Sir David Ford가 재홍콩 한인 상공인들을 초청, 홍콩의 중국 반환에 따른 설명 및 이에 대처한 경제 협조를 부탁했다. 이 자리에서 학교 신축 부지를 할애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 후 당시 총영사 김의명 대사는 즉시 홍콩 총독 앞으로 정식 공문을 보내 부지 확보에 나섰고 홍콩정청도 홍콩 시민의 교육 발전을 위해 이를 승낙하였고, 학교를 홍콩거주민 전체(모든 국적의 학생)에게 개방한다는 조건으로 1992년 12월 현 Sai Wan Ho 1,200평 부지의 사용허가를 받게 된 것이다. 부지 계약서에 명기된 바와 같이 홍콩의 공식언어인 영어와 광동어를 기반으로 한국어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서 영어로 교육하는 국제과정과 한국어로 하는 한국어 과정을 동시에 개설하는 조건이었다.

 


당시 정청 토지 관계 책임자인 Mr, John Chan의 협조가 많았고 건축자금 마련을 위한 정민길 대사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약 US $600만 불이 소요(뒤에 2차로 추가됨) 되는 건설비 1/2 해당 금액을 한국 정부에 요청하기로 하여 많은 협조를 받았으며, 또한 장규찬 한인회장 개인의 지면 인사를 통하여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한인 회장단도 국회 문교분과 위원을 찾아가 예산 할당에 협조를 요청하는 등 '91-'94년 사이 총 HK $2,900만 불의 국내 예산을 지원받게 되었다. 손한주 회장 때부터 시작하여 장규찬 회장 때는 한국 관계기관에 적극 로비 활동을 하였고 문교부에서 직접 건립비의 일부로 보조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매우 드문 경우로 홍콩 한인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홍콩한인회 측도 이미 '85년부터(손상용 33대 회장) 학교 건립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 92년 당시 HK$130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KAL 음악회, 바자회 등을 통한 수입금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36대 장규찬 회장은 당시 거금이던 홍콩 1백만 불을 건립기금으로 내놓아 교민들의 기부금 모금 운동에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한인회가 부담하기로 되어있던 건축비 반액은 Debenture 발행, 홍콩한국학교 완차이 건물 판매 대금, 각종 기부금 등으로 온 한인사회와 지사들, 금융기관 등 모든 교민의 눈물 어린 정성으로 이루어져 총 HK $6,500만 불을 들여 1992년 8월 15일 황은수 37대 회장 때 한국학교 신축건물 기공식을 하였다.

 

3 . 홍콩의 중국반환


동서양이 혼재되어 금융,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한 개방도시, 겉으로 식민지의 색채가 나타나지 않도록 富와 自由가 잘 채색된 도시 홍콩이 1997년 7월 1일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현재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에게는 과거 근대사의 치욕적인 역사의 시발점-“난징조약, “베이징조약”, 1898년 홍콩 “산계지 조차 조약”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역사의 전환기로 진입하는 영광의 날이지만 반대로 영국에게는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식민지 역사에 종결을 내리며 전 세계에 갖고 있던 100여 곳의 식민지 중 가장 잘 키운 효자를 원래의 아버지 중국에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1997년 7월 1일 이후로 홍콩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가 되었다. 중국의 홍콩에 대한 행정 방침은 “안정과 번영”이라는 주제 아래 “일국양제(一國兩制)”, “고도자치(高度自治)”, “항인치항(港人治港)”이며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는 50년 동안 변화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있다. 홍콩 특구와 중국 중앙정부의 관계는 많은 모순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전례 없던 제도로 많은 사람이 현실적 실행에 의구심을 가졌었다.



1979년 홍콩 총독 머리 매클레호스가 북경을 방문하여 '97년 이후 중국의 홍콩에 대한 입장을 청취하는것에서부터 시작한 홍콩의 반환문제는 1982년 9월에 진행된 중"영 회담과 1983년 7월부터 1984년 9월까지 22차례 진행된 중"영 2단계 회담을 거쳐 결정되었다. 결국 대처 영국 수상은 1984년 12월 19일 베이징 방문에서 조자양 총리와 함께 홍콩의 미래에 관한 연합 성명에 공식 서명하였고 이 역사적 사실, 즉 홍콩반환(1997년 7월 1일 0시)을 전 세계에 공포한다. 이후 기본법 기초위원회, 중"영 연락 소조, 입법국 의원선거, 초대 행정장관, 홍콩 정부의 구의원 선거, 패튼 총독의 민주화 개혁조치 등 홍콩의 정치변화 현상과 북경의 “6"4사건”은 과도기에 있는 홍콩인의 민심과 홍콩의 장래를 흔들리게 하는 중대 사건들이었다. 역사적으로 공산당 치하의 뼈저린 경험을 갖고 있던 일부 홍콩인들은 인권과 자유의 문제에 불안을 느끼며 홍콩의 장래를 비관하여 홍콩을 떠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1997년 7월 1일 홍콩 반환 (식민지 역사의 종식) 문제는 우리 한인사회에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었으며 특별한 한인사회의 변동은 없었다.


<홍콩한인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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