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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연의 미술도시, 홍콩] [7] 황금기는 언제일까요? 빌팽 갤러리의 안젤름 키퍼 전시
  • 위클리홍콩
  • 등록 2023-09-22 10:40:31
  • 수정 2023-10-21 13: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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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나라나 민족의 역사에서 경제, 문화, 예술, 학문 등의 성취가 가장 빛났던 시기를 ‘황금기, 황금시대(Golden age)’라 부른다. 나아가 한 인간이나 어떤 영역에서 가장 높은 업적을 이룬 시기 역시 ‘황금기’로 칭한다. 홍콩 빌팽 갤러리에서 이 《Golden Age》라는 제목으로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1945-)의 전시가 열렸다. 키퍼는 1960-70년대를 주도했던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이후, 1980년대 ‘회화’로의 복귀를 표명하면서 부상한 ‘신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동안 키퍼의 작품에서 느껴왔던 것은 엄청난 크기의 회화가 보여주는 황폐함이었다. 위압적인 스케일의 캔버스 위에 두꺼운 물감이나 기름, 아크릴 등의 온갖 재료들이 잔해처럼 켜켜이 쌓여 그 표면을 뒤덮고 있었다. 이러한 작품 앞에 서면 그 제목과 도상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거대한 캔버스 안에 퇴적된 재료들의 강력한 존재감에 먼저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2차 세계 대전 직후 독일에서 태어난 키퍼는 흙, 금박, 나뭇가지, 셸락(shellac), 잿더미, 납 등의 물질성이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독일의 역사를 암시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의 작품은 철학이나 문학에서의 인용과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모티브 등의 복합적인 표현으로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억압되었던 기억과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작업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그에 관한 사전정보들 역시 그의 작품들을 어둡고 무겁게 느껴지게 했다.


[그림1] Anselm Kiefer, Alkahest, 2021-2022

[그림2] Anselm Kiefer, , 2022

 그렇다면 왜 이번 전시의 제목은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를 의미하는 황금시대일까? 갤러리에 따르면, 이 황금시대는 “인류 문명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그리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태고의 번영과 평화의 시대”를 상징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류 역사의 첫 번째 시기를 ‘금’의 시기로 상정하였고, 이는 일종의 유토피아로 여겨진다. 이 유토피아의 황금의 종족들은 모든 악에서 벗어나 좋은 것들이 넘쳐나는 땅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가 비유하는 황금기는 이러한 서구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전시의 제목과 같이 키퍼의 작품들도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그림1/2]. 그러나 황금색 하늘에 맞닿으려 하는 높은 산들은 어둠의 색으로 두껍게 칠해져 있고, 작품의 제목이자 캔버스에 작가의 필체로 기록된 텍스트들은 다층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키퍼가 사용하는 독특한 재료, 특히 금박과 납 역시 낙관적인 유토피아와 모순되는 복잡한 시각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는 인접 국가 등의 적국을 점령하고, 강대국이라는 명성과 함께 금과 권력을 쟁취한 후 이 ‘황금기’를 누렸다. 따라서 이 황금기라는 용어에는 언제나 명암이 존재한다. 황금기 치하에서 행해진 전쟁이나 침략의 어두운 부분을 이 용어가 가진 자부심으로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퍼의 켜켜이 쌓인 페인트와 금박, 그리고 역사의 산들을 한 겹씩 벗겨낼수록 현실에서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u-없다, topia-장소) 그대로의 황금시대를 마주하게 된다.

 

[그림3] Anselm Kiefer, , 2021-2022 / Diamat, 2020-2022

[그림4]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안젤름 키퍼

 복잡한 텍스트와 상징으로 심각해질 때쯤 뜻밖의 오브제가 긴장을 풀어준다. 작품에서 반복되는 ‘자전거’ 모티프이다. 이 자전거는 작품뿐만 아니라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잠시 상영되는 키퍼의 다큐멘터리에서도 포착된다. 녹슬고 핸들도 없이 폐허의 벽돌에 짓눌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작품 속 자전거[그림3]와는 달리 프랑스의 황무지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세우고, 40헥타르가 넘는 스튜디오를 자전거로 왕복하며 거대한 창작물을 창조하기 위해 마치 연금술사처럼 납물을 녹이고, 온갖 종류의 페인트를 칠하는 키퍼를 볼 수 있다[그림4]. 결국, 그의 작품을 통해 현실에서의 황금빛 희망을 목격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자전거를 타고 스튜디오를 유유히 이동하며 작업하는 키퍼를 보며 유토피아라는 세계를 현실에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결국 ‘예술가’라는 비전이 읽혔다.


PLACE 빌팽 갤러리

 

프랑스 전 총리 도미니크 드 빌팽(Dominique de Villepin, 1953-)이 10년 동안 홍콩에 거주한 아들 아서 드 빌팽(Arthur de Villepin, 1988-)과 함께 2019년 홍콩에 설립한 갤러리이다. 외교관이자 정치인 그리고 그 아들로서 예술가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서의 어머니와 여동생 역시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작가로 프랑스에서 오랜 기간 작업한 강명희(1947-)도 빌팽의 전속작가이다. 센트럴 할리우드 로드에 위치한다. 



칼럼 소개 :  홍콩에서는 가장 큰 아트 페어 중 하나인 아트 바젤이 열리고, 세계적인 옥션 회사들이 일 년 내내 프리뷰와 전시를 개최하며, 대형 갤러리들은 동시대 작가들의 최근 작품을 쉴 틈 없이 선보인다. 그리고 홍콩에는 M+ 미술관과 홍콩고궁문화박물관 등이 위치한 시주룽문화지구, 시대에 상관없이 내실 있는 전시를 선보이는 HKMoA와 시각예술 복합문화공간인 K11Musea, PMQ, 타이콴 헤리티지, 전 세계의 유명 및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중소형 갤러리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홍콩은 동서양의 고전미술과 현대미술이 살아 숨 쉬는 미술 도시이다. [미술도시, 홍콩] 칼럼은 미술교육자 원정연이 이러한 장소들을 방문하며 전하는 미술, 시각문화, 작가, 전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정연

미술사/미술교육을 공부하고 미술을 통한 글쓰기를 강의했습니다. 현재는 홍콩에 거주하면서 온·오프라인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홍콩의 다채로운 시각문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 석사 졸업, 서울대 사범대학 미술교육(이론) 박사 수료

- 강남대 교양교수부 강사, 서울대 사범대학 협동과정 책임연구원 및 창의예술교육과정 강사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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