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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하 칼럼 - 한민족의 자존심, 중국교포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5-03-17 1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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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호, 3월18일] 천진외국어대학교 교문 옆에 있는 한식당 <영심이네>서 라면과 밥으로 식사를 했다. 반찬으로 깍두기, 오이무침, 땅콩조림이..
[71호, 3월18일]

천진외국어대학교 교문 옆에 있는 한식당 <영심이네>서 라면과 밥으로 식사를 했다. 반찬으로 깍두기, 오이무침, 땅콩조림이 나왔다.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심부름하고 있는 열 살 남짓 아들의 손길이 재빨랐다. 중국의 50여개 소수민족 중에서 조선족(朝鮮族)으로 분류되는 중국교포들은 한국인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한국식당을 경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중국전역에서 한국요리 나아가서 한국문화를 전하는 외교사절의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고 있다.

중국의 민족은 총인구의 90%이상을 차지하는 한족(漢族)과 국가가 인정한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있다. 인구 100만 명을 초과하는 소수민족은 장(藏)족, 조선족 등·15개 민족이며 이 가운데 장족은 1천만 명을 넘는다. 1949년 이전 중국에서 소수민족 거주지구의 경제와 문화가 만주, 몽골, 티베트족을 제외하고는 한족사회보다 크게 낙후되어 있었으므로 차별과 빈곤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소수민족에 대한 한족의 편견과 차별을 고치는 계기가 된 것은 중국공산당의 장정(長征)시기에 소수민족 거주 지구를 통과하면서 홍군이 직접 직시한 소수민족의 현실이었다. 그런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또 장정과정에서 소수민족들로부터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받았던 중국공산당은 1949년 사회주의 중국 출범과 함께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바로 내놓았던 것이다.

그 기본방침은 민족상호간 평등과 단결, 소수민족지구의 자치, 소수민족 간부의 양성, 소수민족의 경제·문화 발전을 위한 지원, 소수민족의 언어문자의 사용과 발전을 위한 지원, 소수민족의 풍속습관 존중 등으로 집약된다. 민족 상호간의 평등과 단결, 호혜의 원칙은 중국 제 1 차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공동강령으로 채택되었고 그 뒤 신헌법으로 계승되었다. 중앙정부는 신정부 수립 직후부터 각 지역으로 홍보단을 파견하여 대내외적으로 소수민족정책의 우수성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도 하였다. 각 민족에 의한 자치정책은 새로운 중국 민족정책의 골격을 이루는 것으로서 58년까지 각 해당지구의 90%가 지방자치를 실현하였으며, 65년 티베트자치구의 정식 성립으로써 실질적인 완성을 보게 되었다. 2000년 현재 중국정부는 자치구 5개, 자치주 30개, 특별구 2개, 자치현 121개 등 모두 158개의 지역을 자치지역으로 인정하고 1가정 2자녀 허용, 세금우대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고 있다.

만주 땅에 한국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58년 봄부터라고 한다. 국내에서 살기 어려웠던 백성들은 만주로 진출하여 탁월한 농사실력으로 만주를 개발했던 것이다. 1875년 일본과의 강화조약으로 대원군의 쇄국 정책도 해소되고 만주족의 성지라는 이유로 잡인의 왕래를 막던 청(淸)나라의 금령도 폐지되어 농민들의 이민이 부쩍 늘었다. 그래서 조선조 말엽에는 수십만의 우리 민족이 이미 북간도에서 비옥한 땅을 개척하여 터전을 닦았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여 우국지사들은 항일 투쟁을 벌이기 위하여 간도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의 근거지로 삼고 도처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용정은 독립운동 활약 무대의 근거지로 교육 문화의 중심지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간도의 서울이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병합한 후 일본의 강력한 무력 통치는 무장 항일 투쟁을 거의 불가능케 하여 독립 투쟁은 점차로 지하 항쟁으로 바뀌어 갔다. 이 과정에서 만주의 한인들은 일본군들의 처절한 보복을 당하면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간단없이 계속했던 것이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 내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오랜 내전을 통하여 대륙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조선족은 소수민족으로 인정된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 자치주가 설립되었다. 이후 그들은 한민족 특유의 끈기와 자존심으로 중국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부유한 생활수준과 높은 교육수준을 유지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또한 중국 전체의 문맹률은 22%인데 반해 조선족 문맹률은 7%로 매우 낮다. 이와 같은 높은 학력수준 및 낮은 출산율 등은 다른 소수민족의 모범이 되고 있으며, 근면·성실한 민족성으로 중국 내에서 비교적 높은 생활수준을 영위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정부가 추진해온 소수민족 정책의 긍정적 측면을 증명해 주었다. 또 그들은 중국에서 장관급인 민족사무위 이덕수(李德洙)주임, 조남기(趙南起) 인민해방군 대장, 불후의 작곡가 정율성(鄭律成), 국민 가수 최건(崔健)을 배출해냈다. 2002년에 조선족자치주 50주년을 맞이하여 <지나간 반세기의 성과를 바탕으로 희망찬 미래를 열어나가자>, <동북아시아의 빛나는 진주가 되자>를 구호로 내걸고 새로운 도약을 다짐한 바 있다.

지금 연변의 한국인 교포사회는 변화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확천금할 수 있다는 <코리안 드림>과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은 민족공동체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조금의 노동력이라도 있는 사람은 중국의 대도시로 또 한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다. 한국의 농촌 총각들은 연변의 교포 처녀들과의 결혼으로 한숨을 돌렸지만, 이제 연변 총각들은 한족(漢族) 처녀를 찾아 나서고 있다. 소수민족과 한족간의 동화는 소수민족문제를 민감한 사안으로 예의주시하고 있는 중국정부의 은근한 책략이라고 하지만 세계화 - 자본화 시대의 또 다른 방증이라고 보아야한다. 변화가 마냥 가슴 아픈 일만은 아니다. 변화는 변화일 뿐이다. 나아가서 그것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는 법이다.

  재중국교포와 한국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지 어언 10여년, 이제 나름대로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화 시대에 진입하여 해외로 진출하는 한국인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한국인 아니 세계인으로서 세상 곳곳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중국교포들 역시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후예로서 고국과 줄 것은 주고 그리고 받을 것은 받는 그런 정정당당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을 원하고 있다.



<strong>
유영하 교수는  
</strong>
柳泳夏 文學博士

韓國 天安大學校 語文學部 中國語學專攻 敎授
中國 南京師範大學 中韓文化硏究中心 硏究敎授

硏究室 82-41-550-0405
助敎室 82-41-620-9486
(校)Fax 82-41-550-0559

website : http://www.chinahongkong.net
e-mail : yongyongxia@cheonan.ac.kr


330-704
韓國 忠淸南道 天安市 安棲洞 115
天安大學校 語文學部 中國語學專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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