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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역사 산책] 총독부1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9-05-14 16:18:20
  • 수정 2009-05-14 16: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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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9호, 5월15일
홍콩정부의 권력 중심구
 홍콩 예빈부 (前)총독부 Government House)는 1855년 건설되어 제4대 홍콩총독 보링(Sir John BOWRING)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역임한 역대 총독들의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의 관저 및 사무실로 쓰이고 있으며, 귀빈접대와 주요행사시 사용되는 등 여전히 홍콩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대표적인 역사 건축물이다.

위치선정과 건축
1841년 영국인의 홍콩 점령 후 중환일대를 행정중심구역으로 삼고, 지금의 화원도(花園道)와 Upper Albert Road(上亞厘畢道)에서 기련나리 협곡의 산비탈 까지를 정부산(Government Hill)으로 계획하여 식민지정부를 건립했다.

정부산 Upper Albert Road에 위치한 홍콩 예빈부는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Prince Albert: Duke of Saxe-Coburg-Gotha)이 직접 명명했다.

이곳은 산을 등지고 바다를 마주보는 지리적으로 우세한 곳에 위치해 있고, 멀리 빅토리아항이 바라보이며 중구의 경치가 내려다보인다. 아래로는 정부총서(政府總署)와 성요한 성당이 있고, 주변에는 깜종(金鐘)의 군영본부가 있으며, 뒤편에는 꽃향기와 가로수그늘이 있는 동식물공원이 위치하는 등 위치선정에 심혈을 기울임으로써 영국인의 통치방식과 생활모습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예빈부는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후 바로 건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 3대 홍콩총독들은 모두 정부주택이나 혹은 기타 지방에 임대거주지를 임시총독부로 삼았다.

총독부 건축공사는 1851년 비로소 정식으로 전개되었고, 제2대 측량총서서장인 클레버리(Charles St George Cleverly)가 설계를 맡았다(상환의 Cleverly Street(急庇利街)은 그가 명명한 것이다.). 공사는 시공기간동안 종종 문제가 생겨서 4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완공되었다.

사용과 확장
예빈부가 초기 접대한 귀빈들은 모두 외국의 중요인사들과 왕실사람들이었다. 홍콩총독 케네디(Sir Arthur Edward KENNEDY)는 부임 후 중국 상인이 총독부 활동에 참여하도록 중국인에게총독부를 개방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1855년 신고전주의건축양식으로 건축 된 하나뿐인 예빈부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행사를 거행하는 일이 날로 많아지자, 총독 더스벡스(SIr George William DES VOEUX)는 임기기간에 예빈부 동쪽을 증축하여 규모를 확장 시킬 것을 결심하였다.

새로운 확장공사는 구상하는 데에만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1891년 비로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대, 사용한지 70년이 넘은 예빈부가 점점 낡아가자 총독 필(Sir William PEEL)은 Magazine Gap Road(馬已仙峽道)에 새로운 총독부 건축을 건의 하였지만, 경제적인 문제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계획은 어둠속에 묻혀버렸다.

일제강점시기의 큰 변화
 역대 홍콩총독부터 홍콩특별행정구장관에 이르기까지 모두는 예빈부를 수리하였다. 그러나 현재 예빈부의 외관은 일제강점시기 보수 공사하여 완성된 것이다. 일본의 홍콩 점령 후, 총독 이소가이 렌스케(Isogai Rensuke)는 비록 예빈부에 입주하지 못했지만 이곳을 독헌부(督憲府)로 삼고 당시 26세의 젊은 건축사 세이치 후지무라(Seichi Fujimura)에게 설계를 위임하여 관저로 재건하였다.

새로운 설계는 주로 중앙빌딩을 증축하는 것이었다. 지붕은 일본식 기와로 바꾸고 벽을 수리하여 장식하였는데, 내부는 일본식 쟁문(趟門)과 다다미대로 장식하였다. 또한 일본인의 필요에 맞게 차실(茶室)을 만들었다. 전체적인 구조와 짜임새는 예빈부를 동양의 고상한 운치를 엿볼 수 있는 상징적 건축물로 바꿔놓았다.

이런 예빈부는 1944년 준공되었지만 이듬해 일본군은 항복을 선포하였다. 1945년 9월 16일 항복문서 조인식은 가짜 예빈부가 거행하였다. 당시 사용되었던 긴 탁자는 현재 홍콩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전쟁 후 홍콩정부는 일본인이 완성한 예빈부를 이전모습으로 보수작업 하였고, 관저를 처음상태로 복구하여 마침내 내부수리를 결정하고 계속하여 홍콩총독의 관저로 사용하였다.

역사의 수수께끼
예빈부는 일제강점시기 큰 개조공정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수수께끼로 묻혔다. 1941년 12월 12일 홍콩이 함락되기 전날 밤, 홍콩총독 영마크(Sir Mark Aitchison Young)는 일본군의 약탈을 피해 정부안에 차타드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을 몰래 숨겨둘 것을 명령하였다. 3명의 수장책임자는 일제강점시기 잇따라 세상을 떠났고, 수장품이 감춰진 곳도 홀연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전쟁 후 예빈부 내에서는 일찌감치 「보물찾기열풍」이 일면서 정부의 여러 차례 조사와 발굴이 진행되었지만, 모두 성과 없이 돌아올 뿐이었다. 수장품은 지금 까지도 그 소재가 불분명하며 여전히 역사의 깊은 곳에 매장되어있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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