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감옥에 수감된 국부, 외에 다른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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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국부 호치민> |
1931년 6월 6일 홍콩 경찰은 잔뜩 긴장한 채로 구룡(九龍)성에 있는 한 주택을 포위한 다음 문을 부수고 진입하여 한 남성과 여성을 끌고 나왔다. 남성은「宋文初(Sung Man Cho)」라는 사람이며 중국 광동사람으로 36세이며 싱가포르에서 홍콩으로 왔다. 여자의 이름은 李三(li Sam, 또는 Ly Phuong Thuan 나이는 18세 정도였으며 후에 석방되었고 같은 해 8월말까지 출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이었으며, 이 두 사람은 장갑차로 호송되었고, 이관 (이관) 후 빅토리아 감옥에 수감되었다. 빅토리아 감옥에 수감된 이 송문초(宋文初)라는 사람은 훗날 베트남민주공화국 사람들이 존경하는 국부(國父) 호치민(Ho Chi Minh)이었다. 호치민이라는 이름은 1940년대 비로소 정식으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베트남의 국부가 홍콩에서 박해를 받은 것은 비교적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호치민이 홍콩에서 체포되었을 당시는 그가 혁명에 가담한 후 가장 험난한 시기였으며, 이 사건은 투쟁에 대한 법률적 관점과 체포절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홍콩고등법원에서 심사 처리되어 영국 국가기밀원에 상소되었고 최종적으로 호치민은 석방되었다. 호치민 사건은 홍콩사법의 독립정신을 체험하기에 충분하였다. 그 후, 호치민은 더욱 아슬아슬하게 위험에서 벗어나는 경험들을 하였다.
베트남은 1884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고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호치민은 가장먼저 阮愛國(구엔 아이 쿡 '애국자 구엔')라는 이름으로 1920년 프랑스공산당에 가담하였고, 프랑스, 러시아, 중국 그리고 기타 여러 곳에서 혁명 활동을 진행하면서 프랑스식민지정부의 감시를 받았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많은 반(反)식민지 혁명 활동이 일어났고, 프랑스는 식민지 정부를 매섭게 몰아 부쳤다. 1929년 9월 베트남 Nghe An(베트남 중심부)의 법원은 호치민이 부재중에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1930년 2월 베트남의 많은 공산주의조직 대표들은 홍콩에서 회의를 열어 베트남 공산조직을 통일하기로 결의하였다. 1931년 초 프랑스 식민지정부는 많은 공산당조직을 탄압하였고, 베트남의 정세는 흔들렸다. 4월 말 프랑스 경찰은 「공산당 혁명분자」무리를 체포하였고, 그들의 몸에서 4월 24일 호치민이 보낸 편지를 찾아냈다. 그 후, 영국경찰은 싱가포르에서 또 한명의 공산국제 특파원을 체포하여 홍콩 구룡성 탐공도 (譚公道) 186호의 주소를 확보하였다.
프랑스정부는 즉시 홍콩정부의 협조를 구하여 그곳에 머물고 있던 호치민을 체포하였다. 호치민은 배를 타고 베트남으로 돌아가 처벌되기를 원하였다. 홍콩정부는 체포령이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호치민을 체포하여 그를 경찰서 내에 있는 구치소에 구금하였다. 6월 11일 홍콩정부는 정식으로 체포령을 발표하였고, 이튿날 빅토리아 감옥으로 호송하였다. 홍콩정부는 영국 식민지부의 지시에 따라 그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출국시켜 10년 동안 홍콩의 출입을 금하였으며, 그는 프랑스 증기선에 인도되어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7월 31일부터 9월 19일 까지 고등법원은 9차례의 공개재판을 열었고, 홍콩의 언론매체들 역시 이것을 보도하였다. 예를 들면 《덕신서보 德臣西報》에서는 1931년 8월 24일 「홍콩정부는 정치 망명자를 추방할 권리가 없다.」라는 표제를 달고, 고발과 변론 쌍방의 법률적 관점과 변론하는 변호사측에 찬성하는 추세 등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재판결과 고등법원은 호치민을 추방하기로 하였다.
변호사 Francis Henry Loseby는 호치민이 프랑스 식민지정부에 지명수배당하여 홍콩의 정치범으로 구금된 것은 영국법률의 원칙에 위배되는 홍콩법원의 잘못된 판결이라는 이유로 영국 런던기밀원에 상소를 올렸다. 1933년 초 호치민은 배를 타고 싱가포르에 갔으나 체포당해 홍콩으로 송환되었다.
홍콩경찰은 호치민을 체포하여 다시 빅토리아 감옥에 수감하였다. 호치민은 Francis Henry Loseby변호사에게 이를 알려 대책을 강구하였고, Francis Henry Loseby변호사는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 홍콩총독 필(Sir William PEEL)을 만나 호치민의 무죄를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총독은 이에 동의하였고, 호치민을 석방하도록 명령하였다. Francis Henry Loseby 변호사는 먼저 호치민을「중국천주교청년회」숙소에 잠시 머물도록 하였고, 경찰의 눈과 귀를 피해 그를 중국학자로 위장하여 아모이로 가는 배에 태우고 몰래 홍콩을 빠져나갔다.
그 후, 호치민은 아모이에서 상해로 가서 손중산의 아내 송경령(宋慶齡. 손중산의 초상화 앞에 서 있는 송경령)의 협조를 받아 다시 먼 모스크바로 가 계속하여 혁명 사업을 하였고 마침내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건립하였다. 호치민은 1920년대 Mikhail Borodin의 통역을 맡으면서 송경령과 알게 되었다. 前 국무원 해외교민사무실 주임 료승지(廖承志)의 기억에 따르면 송경령은 1933년 공산국제 가입허가를 얻었다.
그는 홍콩에서 박해당한 경험을 2006년 호치민 박물관에서 출간한《호지명안-胡志明案》에 기재하였고, 이 책은「호지명홍콩몽난기-胡志明香港蒙難記」라고도 불리며, 변호사 Francis Henry Loseby등 사람들을 회상하여 서술하는 등 그림과 글이 풍부하고 다채롭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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