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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역사 산책] 유태교회당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9-09-17 12:43:12
  • 수정 2009-09-17 12: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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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6호, 9월18일
방황과 단결
유태교도들이 중국에 온 시기는 당(唐)말기 황소의 봉기가 일어났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 때 하남성에 정착하였으나, 19세기 중엽 해체되었다. 홍콩유태인사회단체는 19세기 중엽 서양열강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면서 중국에 형성된 4개의 사회단체 중 하나이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가 변화 발전하면서 상해, 천진, 하얼빈 세 곳의 유태인사회단체는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사이 잇따라 해체되었고, 홍콩에 있던 유태인사회단체만이 홍콩의 독특한 지위로 인해 보존 발전되면서 중국근현대 사상 유일하게 지속적인 역사와 완전한 사회적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각지에서 모인 홍콩유태교도
 19세기 중엽이후, 중구(中區)의 Pottinger Street 서쪽과 Queen's Road 중간지점부터 Robinson Road에 이르기 까지 이곳에는 영국인 이외에 다른 민족의 종교문화와 관련된 건축물이 가득했고, 이는 이 일대가 여러 민족의 문화가 융합된 곳이라는 것을 반영하였다. 그 중에는 전통 문화를 대표하는 문무사당이 있으며 이슬람사원과 유태교의 리아당(莉亞堂 Ohel Leah Synagogue)이 있다. 리아당은 유태교를 대표하는 회당인 동시에 유태인들의 지표로써 홍콩의 유태인을 응집시킨다.

유태교사당(猶太廟)으로도 불리는 리아당은 홍콩 반산구(半山區) Robinson Road와 Castle Road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리아당은 홍콩에 최초로 건축된 유태인 회당이며 지금은 홍콩일급역사건축물에 속한다. 유태교회당(猶太會堂)의 서양식 명칭은 그리스어 「συναγωγη」에서 기원하였고 영어로는 Synagogue로 이는 「집회의 장소」라는 뜻이다.

 모든 신도들이 유태교회당에 모여 기도하는 것이 유태교의 특징이며, 이론상으로는 깨끗하지 않은 곳을 제외하고 유태교도들은 어느 곳에서든지 기도를 드린다. 유태교율법에 따르면 13세 이상의 유태교남자들은 반드시 하루에 10명 이상이 모여 3번 기도를 드려야한다. 이것이 유태교회당이 처음 설립될 당시의 목적이었다. 이외에 유태교회당은 성인과 취학아동의 교육 등 공공활동 장소로도 쓰였다. 홍콩에서는 유태교회당을 「Shul」라고 부르는데 이는 독일어「학교」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홍콩의 유태교는 정통파와 보수파 그리고 개혁파로 나누어진다. 유태교회당 역시 리아당과 홍콩연합유태당, Chabad Lubavitch 이렇게 세 곳이 있다. 리아당의 신도는 대부분이 정통파이며 1997년 리아당의 신도 명부(Ohel Leah Synagogue Membership List)에 따르면 당시 등록된 신도 수는 256가정 600여명에 달했다. 매일하는 집회 이외에도 리아당에서는 안식일과 절기행사가 거행된다.

중동에서 온 홍콩의 유태인 역사는 18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콩개항초기 유태인들이 홍콩에 거주하면서 1850년대 홍콩정부는 해피벨리에 있는 한 폭(幅)의 무덤을 유태인들에게 주었고, 이곳에서 유태교는 건립의 토대를 닦고 임시 회의소로써 종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홍콩 경제가 끊임없이 발전함에 따라 홍콩으로 와서 장사하는 유태인 수는 날로 증가 하였다. 1901년 Castle Road와 Robinson Road가 교차하는 곳에 홍콩의 첫 번째 유태교회당이 건축기초를 다잡았으며, 1903년 완공되었다. 토지와 건축비용은 Sir Victor Sassoon과 그 형제가 기부하였다. 유태교회당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물 중에 하나였다. Sassoon형제는 그들의 어머니 Leah여사를 기념하기위해 이 건물의 이름을 리아당 이라고 하였다. 홍콩의 유태인들은 종교집회를 매우 중요시하는데 이는 집회 참여가 신도들의 종교, 문화 그리고 사교생활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유태교회당의 설계
 유태교 리아당의 건설기초는 전통신앙의 원칙에 따라 중세 스페인과 동유태의 건축방식을 혼합하여 설계하였다. 회당은 2층이며 고대 로마회당을 본 따 지어졌고, 일자형 평면구조의 신성세지(神聖洗池)는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있다. 뜰에 있는 사당은 동, 서 방향에 있으며 가장 중요한 장경고(藏經庫)는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홍콩이 예루살렘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구는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대문 앞에는 팔각형 현관이 있고 대문 좌우에는 각각 팔각형의 탑이 있다. 성전 안에는 대예배당과 다락방 그리고 각각의 좌석이 있는데, 전통상 남자신도들은 좌석에 앉고 여자신도들과 아이들은 다락방에 앉는다. 유태교회당의 외형은 6세기 초 터키의 기독교와 중동일대의 성전양식, 13세기 스페인 남부에서 유행하던 건축양식을 혼합해 놓았다.

유태교 리아당은 1998년 보수하였고, 그 후 2000년 연합국교과문조직에서 수여하는 아시아태평양지역 문물고적보호상 우수상을 받았다.

홍콩유태인사회의 발전
제1차 세계대전 후, 홍콩의 유태인수에는 큰 증가 없이 시종 수백 명 안팎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유태인들이 히틀러의 대학살을 피해 홍콩으로 도망쳐왔고, 홍콩에서 각종 상업과 무역활동을 하였다. 그런 후에 다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중국 등지로 나아갔다. 현재 홍콩에 거주하는 유태인수는 대략 1,000명이 넘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부유한 공상업계 인사들이다.

홍콩의 유태인사회단체는 매우 활발하다. 학교설립과 주일공부를 하는 것 외에도 유태부녀협회를 포함해 연합이스라엘자선회, 이스라엘상회 그리고 유태역사학회 등 여전히 많은 자선기구와 문화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리아당 인근에는 원래 유태회의소(Jewish Club)가 있었는데 모든 유태인이 오락을 즐기는 곳이었다. 후에 주택으로 재건하였으나 여전히 유태교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유태인 서비스회원들은 홍콩의 유태인가정에 유태 본지의 음식과 연회, 안락한 문화시설 그리고 각종활동 과 학습반을 제공하였고, 유태인사회단체의 중심에는 도서관이 있어 전문적으로 유태문헌과 문물을 소장하였다.

리아당 명단 기록에 따르면 홍콩에서 활발했던 유태인가문 중 가장 영향력 있고 유명한 가문은 Sassoon, Kadoorie, Belilios, Ezra등의 가문이었다. Sir Victor Sassoon은 비교적 단기간에 입신출세하여 홍콩과 상해에서 유태인 갑부가 되었으며, Kadoorie와 그의 아들은 1880년 상해에서 Sassoon을 따라 홍콩으로 와서 영국인에게 광주(廣州)에 있는 전력공장(지금의 CLP 홀딩스(中電))을 사들였고 Hok Yuen Street에 전력공장을 건설하여 홍콩을 발전 시켰다. 오늘날 CLP 홀딩스의 시장가치는 약 1,600억원(홍콩달러) 정도 이다. 전력공장을 경영하는 것 외에 Kadoorie가는 1866년 홍콩상해대주점유한공사(香港上海大酒店有限公司)를 창립하여 침사추이(尖沙咀)의 반도주점(半島酒店)을 포함, 상해를 시작으로 세계각지에 많은 체인점을 두었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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