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나며.... 던져진 윷판나는 간다. 산더미 처럼 쌓여있는 일들을 지리하게 읽던 책 덮듯 척 덮어놓고 훌쩍 길을 나선다. 여행을 시작한 몇 시간 전까지, 사실 나는 백야의 나라 러시아로 떠나는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이 가져다주는 설렘보다는 지난 한 주 동안 쫓기듯 준비한 이번 여행으로 인해 마음과 정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이번 여행이 그동안 해왔던 그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첫 판부터 삐걱댔다는 거다. 윷판을 깔아놓고 모나 윷을 기대하며 힘껏 던졌는데, 그 잘 나온다던 개도 아니고 도도 아닌 빽도가 떡하니 나온 꼴이다. 낙장이 아닌게 퍽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걸까.
지난 여름 '베스트 레스토랑 홍콩 마카오' 책을 함께 낸 제니퍼와 몽유도원도를 그리듯 꿈꾸며 그려온 여행이었고, 재기발랄한 그녀와 속닥대고 재잘대며 긴긴 비행을 함께 한다는 것에도 은근히 기대를 걸었건만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나만 비즈니스고 그녀는 빼도 박도 못하는 이코노미클라스다.
여하간 우리는 홍콩에서 치열한 하루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수많은 비즈니스맨들과 함께 홍콩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대한항공 밤 12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녀는 이코노미에, 나는 비즈니스에 각각 앉아있다. 이 넓고 편한 비즈니스클래스의 좌석이 참으로 바늘방석이다.
베트남 쌀국수 '너에게 복이 있을지니'
들쑤셔진 벌집처럼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잠을 청해본다. 마술에 걸린 듯 잠속으로 빠져든다. 얼마나 잔걸까? 아득히 들려오는 딸각거리는 소리와 구수한 음식냄새에 의식이 빠른 속도로 돌아온다. 새벽 두 시다. 이 엄한 새벽에 어떻게 저런 달콤한 웃음을 지을까 싶은 승무원이 다가와 저녁을 준비해 줄까하고 묻는다. 호시탐탐 불어날 궁리만 하는 살들의 성화에 'No'라고 얘기해야 하건만 나는 벌써 먹겠다고 대답부터 한다. 비빔밥과 베트남 쌀국수가 있단다. 밥보다야 국수가 속도 편하고 영토 확장을 꿈꾸는 살들에게도 기회를 잠시 미루게 할 수 있을 듯하여 쌀국수를 주문한다. 곧이어 커다란 사기대접에 구운 오리고기를 쑴득쑴득 썰어 올린 먹음직스러운 국수 한 사발이 떡 하니 내 앞에 나타난다. 잘게 썬 붉은 고추와 파, 다대기를 왕창 집어넣고 국물을 한 술 떠 입에 넣어보니 맛이 기가 막히다. 그 많아 보이던 국수 한 사발을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몽땅 비운다. 뜨끈한 베트남 쌀국수 한 사발에 심란한 마음조차 녹아든다. 나의 기분을 다시 행복모드로 찰칵 맞춰놓으며 무릎팍 도사 강호동 버전으로 베트남 쌀국수 한 사발에 복을 내린다. "지치고 힘든 이들의 여정에 따끈한 위로가 되어주는 너, 베트남 쌀국수에게 크나큰 복이 있을지니..... 그대 만인들로부터 더욱 사랑받을 지어다!!"
새벽 3시다. 착륙시간을 한 시간여 남겨둔 채 앞에서 누군가가 일어나는 기척을 보이자 승무원 한 명이 또 달려가 상냥한 목소리로 식사를 하겠냐고 묻는다. 그는 나보다 더 강적이다. 비빔밥 한 사발을 시켜 뚝딱 먹어치운다. 비행기가 더 육중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인천국제공항으로 착륙한다. 비행기가 뜰 때와 착륙할 때 나는 야릇한 희열을 느낀다.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악명 높은 러시아항공 '에어로플로트' 대한항공은 수, 금, 일 주 3회 모스크바를 오간다. 그러나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상트베르크까지 당일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2시간 빨리 떠나는 에어로플로트로 예약을 했다. 악명 높은 에어로플로트(대한항공과 코드쉐어), 그것이 어이없게도 우릴 팔자에도 없는 생고생의 서막으로 내몰 줄 누가 알았으랴.
12시 50분에 출발해야하는 에어로플로트는 인천공항에서 기체에 결함이 있다며 떠날 줄을 모른다. 엔지니어의 체킹을 받고 있다는 짤막한 안내방송 외에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물 한 모금 얻어 먹지 못한 채 2시간여를 우리는 기내에 묶여 있다. 재정악화로 모스크바 항공들이 정비 예산을 크게 줄이고 있어 안전사고의 위험이 높다는 영국 유력 경제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의 지적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건가??
버스라면 러시아고 여행이고 뭐고 다 취소하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애써 잠재우고 있으려니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인다. 제대로 모스크바에 도착이나 할 수 있으려나 싶은 불안이 엄습한다. 이모뻘 되는 육중한 승무원 아줌마들의 침울한 표정, 승객을 대하는 안하무인격의 서비스 태도. 갈수록 태산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배는 고프다. 1시간 쯤 날아갔을까, 기내식이 나온다. 초등학생이 먹어도 배고플 만큼의 알량한 기내식을 옐친대통령보다 더 큰 덩치의 러시아인들은 두 말없이 받아들고 싹싹 비운다. 맛은 그런대로 괜찮아 나도 그들을 따라 싹싹 비운다. 옆에 앉은 제니퍼는 도저히 못 먹겠다며 포기하고 다른 걸 달라고 하니 승무원은 참으로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무안해진 그녀는 허기진 배를 안은 채 잠을 청한다. 무작정 나를 따라 나섰다가 험한 길로 접어든 그녀가 갑자기 안쓰러워 진다.
대여섯 시간이 지나 잠에서 깬다. 갈증이 심하게 나지만 꾹꾹 참는다. 물 달라고 호출버튼을 눌렀다가는 자칫 날벼락이 날아들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잠을 청한다. 꿈속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윷놀이를 한다. 여지없이 모나 윷을 기대하고 힘껏 던진다. 낙장이다.
비행기가 날카로운 굉음을 내며 10시간 만에 모스크바 공항에 착륙한다. 기내에서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처럼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모스크바인들이 우르르 박수를 친다. 악명 높은 혹은 어처구니없는 항공이라 불리는 에어로플로트의 작은 창 너머로 태극문양을 자랑스럽게 단 대한항공이 보인다. 와락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 계속....
* 대한항공은 인천과 모스크바를 주3회 직항으로 운행하고 있습니다.<글&사진 로사 rosa@weeklyh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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