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좀 홍콩으로 보내줘 제발!!"언니야, 나 이제 더이상 러시아가 싫다. 무섭다 아이가. 나 내일 돌아갈란다. 근데 지금 몇시가? 지금 선물가게로 가볼란다"
"9시 반이 넘었으니 문 닫았겠지. 가봐야 소용없잖아. 내일 가자, 내일"
"아니다, 언냐, 나 지금 갈란다. 언닌 있어라, 내 다녀올란다"
"알았어 같이 가자, 같이 가"
우리 둘은 마트로시카 인형을 한 보따리 안고 가게를 향해 냅다 뛰기 시작한다. 달그락달그락 대는 인형 봉지를 들고 올림픽에 나온 선수들처럼 괴력을 발휘해 마구 달려가는 우리를 보는 러시아인들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러나 가게는 굳게 닫혀있다. 허탈한 심정으로 터벅터벅 호텔로 돌아온 제니퍼는 다시 하소연을 한다.
올해는 되는 게 하나도 없단다. 비행기 자리가 이상하게 된거며, 러시아항공 출발이 2시간이나 지연된거며, 국내선을 놓치고 고스란히 돈을 다 내고 또다시 표를 끊은거며, 택시기사에게 엄청난 바가지를 쓴 거며... 운이 억세게도 나쁜 자신의 금년운에 대해 밤이라도 샐 듯 나열하는 그녀. 결론은 러시아고 뭐고 다 때려치고, 내일 당장 돌아가도록 해달라는 거다. 저렇게까지 애원을 하는 그녀를 설득해 이 러시아 여행을 마지막까지 감행하다 더 억세게 사나운 꼴을 당하면 그건 다 내 책임이 될까 싶어 더럭 겁이 난다. 그래, 그렇게 하자, 내일 돌아가자, 날이 밝는대로 홍콩에 연락해 항공권을 변경하겠노라고 안심을 시키니 알았다며 잠을 청한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잠을 못 이루고, 이러저리 뒤척이다 수면제를 몇 알 입에 털어 넣고는 깊은 잠속으로 빠져든다. 인형을 몇백만원어치 사놓고도 나는 어제와 다름없이 포근한 침대에서 꿀잠을 자고, 다음 날 새벽, 홍콩에서 걸려온 아들녀석의 전화소리에 잠이 깬다.
컴퓨터를 켜고 홍콩 대한항공에 연락을 한다. 당장 홍콩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는 요청에 깜짝 놀라 이리저리 알아보더니 이곳 뻬째르에서는 한국으로 가는 직항은 없으니 모스크바를 거쳐 돌아가야 한다고 답을 해온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모스크바에 잡아놓은 호텔은 취소조차도 안 된단다. 허탈해하는 제니퍼, 그러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러시아까지 왔는데 모스크바를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부터는 호텔 음식으로 호사를 할 처지가 아니라 근처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에 가서 대충 허기를 채우고, 선물가게 오픈시간을 기다렸다가 들어가니 어제와는 전혀 다른 얼굴들이 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한다. 자기네는 모르는 일이라며 내일 오란다. 우리는 내일 모스크바로 떠나니 시간이 없어 오늘 꼭 환불해줬으면 좋겠다고 통사정을 해도, 내일 바로 그 사람들하고 해결을 보라고 못을 박는다.
뻬쩨르에서 제대로 봐야 할 관광지가 한두 군데가 아니니 내일일은 내일 생각하자고 서로를 다독인 뒤 우린 하얀 입김을 쏟으며 다시 거리로 나선다.
날씨가 겁나게 춥다. 손도 얼고, 발도 얼고, 코도 귀도 다 얼어 떨어져 나갈 것만 같다. 홍콩서 가져온 겨울옷을 아무리 껴입어도 강추위를 끝내 견디지 못해, 인형을 수백만원어치 사놓고도 할 수없이 모피 모자와 목도리를 사서 얼굴과 머리를 꽁꽁싸맨다. 제니퍼는 자기에게 어울리는 게 없다며 울며 겨자먹기로 군밤장수 벙거지 같이 생긴 모자를 하나 산다. 모피로 완전무장을 하고나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10센티나 될법한 하이힐부츠에 스키니진을 폼나게 입은 쭉쭉빵빵 러시아 미인들과 영화배우 같이 잘생긴 러시아 남자들, 그리고 100kg은 족히 나갈 것처럼 보이는 뚱보 아줌마들과 아저씨들이 넵스키 거리를 활보한다. 러시아 미인을 두고 '순간 미인'이라고 하던가. 처녀 때는 저렇게 늘씬한 미인이었다가 혹독한 추위로 인한 집안생활, 기름진 음식, 생활습관 때문에 금방 뚱보가 된단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삭 성당 그리고 피의 사원19세기 초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을 모델로 삼아 개축한 이삭성당에 들어간다. 이름만 성당이지 현재는 건축과 19세기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표트르 대제가 자신의 생일인 5월30일, 성 이삭성당의 공사를 시작했는데 이날이 바로 성 이삭의 날이었기 때문에 성 이삭 성당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한참을 이삭성당에서 머물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우리는 참으로 재미있는 모습을 하나 발견한다. 바로 우리 앞에 있던 서양남자 하나가 제니퍼와 똑같은 군밤장수 벙거지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키득키득 웃는 우릴 보더니 그들도 제니퍼의 벙거지를 발견하고는 피식피식 웃는다.
피의 사원으로 가기 위해 운하를 끼고 한참을 걷다보니 러시아 군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는 카잔성당이 나온다. 여기서는 성당 앞에서 사진만 한 장 찍고, 뻬쩨르에서의 하이라이트가 된 피의 사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엽서나 카렌더, 테트리스 게임에서나 봤던 피의 사원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마구 설렌다. 양파 모양의 돔과 화려한 색깔의 모자이크는 너무나 아름답다. 게다가 바로 앞에 운하가 흐르고 있어 더욱 이국적이고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그리스도 부활 성당이 ''피의 사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유는 알렉산드르 2세가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고, 훗날 그를 기리기 위해 이 성당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당으로 사원으로, 넵스키 거리로 하루 종일 이리저리 걸으며 여행의 마무리를 한 우리는 내일 모스크바로 떠난다. 그러나 생각만 해도 살이 떨리는 그 공포의 인형을 오늘도 한 가득 안고 잠을 청해야 한다. 내일은 기필코 공포의 인형 저 마트로시카를 처치하리라.
/계속....
* 대한항공은 인천과 모스크바를 주3회 직항으로 운행하고 있습니다.
<글&사진 로사 rosa@weeklyh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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