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부터, 홍콩에서 살면서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생겼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벌어지는 천만가지의 별의별 스토리들을 하나 둘씩 풀어내 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들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울화가 버럭 치밀기도 하고, 참으로 황당하여 어이가 없기도 하다가도 때로는 지레 가슴이 찔려 아파오기도 하며 더러는 가슴이 뭉클해져서 눈물을 글썽일 때도 있다.
어떠한 논리를 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거나 설득시키고 이해 시켜야 하는 버거운 글 작업이 아닌 일상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그냥 수다 떨듯 줄줄이 늘어놓는 그런 글 작업을 이제부터 하고자 한다.
오늘은 가장 먼저 '화투'에 대해 이야기이다. 초장부터 웬 화투냐며 눈이 동그래질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이 모이면 어김없이 화투장을 들어야 가족모임이 끝나는 가풍을 가진 분들이 나름 많고 우리 집(솔직히는 시댁)도 예외일 수 없다.
지금은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아들 진호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한국학교를 다닌 적이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 고사성어와 속담에 관심이 많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바로 그것들에 기가 막히게 대입을 잘한다.
한 아이와 장난을 하던 중에 하나를 던져 둘을 얻는 상황이 생겼다. '일석이조'라는 4자성어가 나와 줘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 진호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1타2피"였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눈을 허옇게 흘기며, 도대체 그 말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따져 물었다. 진호의 대답은 이랬다.
"작년 여름방학에 서울에 갔을 때 할머니가 친척들과 고스톱치면서 하던 말인걸요."
'고추'와 '화투'의 공통점... '시작은 일본, 꽃핀 곳은 한국'
역사적 문물은 서로 주고받으며 발전하듯이 한국과 일본 역시 마찬가지. 지리적 인접성 , 역사적 특수 관계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건네받았지만 정작 한국에서 꽃 피운 것, 시작은 일본이었지만 지금은 한국의 문화로 정착된 것"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추'와 '화투'가 아닐까?
먼저 고추는 잘 아는 바와 같이 포르투칼에서 16세기 일본에 전해진 뒤 '임진왜란' 때 한국에 건너온 것이다.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받아들였지만, 고추야말로 우리 조상들이 꽃 피워낸 대표적 사례다.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화투'다.
화투는 '19세기 경 일본에서 건너온 놀이'다. 그러나 정작 일본에서는 없어지고, 한국에서는 명절 때는 물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의례 필수로 여겨진다. 게다가 한국인의 독창성(?)으로 부지기수의 '고스톱' 방법을 만들어냈다. 자 이제부터 화투 48장의 뜻과 뒷얘기를 소개할까 한다.
'꽃 그림 놀이'화투를 한자로 쓰면 '花投'다. 일본에서는 화찰(花札-하나후다)이라고 부른다. 꽃이 그려진 카드를 던지는 게임, 또는 꽃이 그려진 카드를 맞추는 게임이라는 뜻. 그럼 화투가 일본에서 만들어졌을 때 화투의 48장, 특히 1월부터 12월까지의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까?
1월 - '복과 건강'을 담은 송학 1월에는 솔(松)과 학(鶴)이 나온다. 먼저 솔부터 설명을 하자면, 일본에는 정월 초하루부터 1주일 동안 소나무(松-마쯔)를 집 앞에 꽂아두는 풍습이 있다. 카도마쯔(門松)라고 불리는 세시풍속으로 福을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물론 요즘도 집이나 회사에서 이뤄지는 전통이기도 하다.
학은 우리도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치듯 일본에서도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동물. 결국 1월의 화투는 '福과 건강'을 비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2월 - 매화2월은 일본에서 매화 축제가 벌어지는 달이다. 또 매화나무에 앉아있는 새는 꾀꼬리류의 휘파람새(鶯-우구이쓰)라고 한다. 일본의 초봄을 상징하는 새라고 한다.
3월 - 사쿠라3월은 잘 아시다시피 벚꽃, 즉 사쿠라(櫻)이다. 3광(光)을 살펴보면, 대나무 바구니에 벚꽃을 담아놓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만마쿠'(慢幕)라고 부르는 막이다. 각종 식장에 둘러치는 전통휘장으로 쓰인단다.
4월 - '등나무'와 '비둘기'는 전통명가의 상징 검은 싸리나무처럼 보여 보통 '흑싸리'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등나무(藤-후지) 줄기와 잎을 그린 것으로 등나무는 일본의 초여름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가마의 장식 또는 가문의 문장(紋章)으로도 자주 쓰이는 나무이다. 일본에서 후지(藤)로 시작하는 이름들, 예를 들어 후지모토(藤本), 후지타(藤田), 후지이(藤井)등의 이름이 많은 것도 '등나무'가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친숙한 나무인가를 설명해주는 사례.
또 4월에 그려진 새는 비둘기(鳩-하토)이다. 일본에서 비둘기는 '나무에 앉더라도 자신의 부모보다 더 낮은 가지에 앉는 예절바른 새'로 평가된다. 가문의 문장 (紋章)에 쓰는 엄숙함이 담겨진 등나무인 만큼 거기에 앉는 새도 '예절의 상징'인 비둘기를 썼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
5월 - '초'가 아닌 '창포'우리는 초(草), 즉 난초라고 하지만 실제는 '창포(菖蒲-쇼우부)라고 한다. 5월의 풍취를 상징하는 꽃이라고 하는데 이 점은 우리하고 비슷하다. 우리도 5월5일 단오날 창포물에 머리감는 풍속이 있으니까.
6월 - 향기 없는 모란에 왠 나비?모란이다. 일본에서는 '보탄'(牧丹)이라고 해서 꽃 중의 꽃, 고귀한 이미지의 꽃으로 인식된다. 여기서도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발견되는데, 한국에서는 모란은 향기가 없다고 해서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는 게 관례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지, 아니면 모란의 향기를 확인했는지 나비를 그려 넣었다.
7월 - 멧돼지의 등장이유는? 속칭 '홍싸리'라고 한다. 실제로도 7월의 만개한 싸리나무(萩)를 묘사한 그림. 앞에서 설명했듯 4월의 '등나무'를 '흑싸리'라고 오해(?)하는 것도 4월의 꽃이 이 7월의 꽃 생김새와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싸리나무를 지나고 있는 동물은 멧돼지(猪-이노시시)인데 왜 멧돼지가 7월에 등장하는지는 아직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8월 - '한국과 일본의 그림이 달라요'속칭 '8월의 빈 산(八空山)'이라고 하지만 화투 48장 중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뒤 그림이 바뀐 것이 이 8월이다. 원래 일본화투의 8월에는 '가을을 상징하는 7가지 초목 (秋七草)' - 억새, 칡, 도라지 등-이 그려져 있었는데 우리의 지금 화투에는 이런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밝은 달밤에 세 마리의 기러기가 떼 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있을 뿐이다.
9월 - '일본 중앙절'과 '9쌍피'에 담겨진 장수9월은 국화다. 국준(菊俊)이라고도 한다. 9월에 국화가 등장한 것은 일본의 중앙절(9월9일) 관습의 영향이다. 이때가 되면 '술에 국화꽃을 넣어 마시면서 무병장수를 빌었다'고 한다. 9월의 '열 끝자리-흔히 쌍피로 대용되는 그림'을 보면 목숨 '수(壽)'자가 적혀있다. 무병장수를 빌었던 9월 중앙절 관습 때문인 듯.
10월 - 사슴은 사냥철의 의미단풍의 계절이다. 단풍과 함께 '사슴'이 등장하는 것은 사냥철의 의미라고 한다. 단풍에 사슴이 곁들여진 아름다운 자연을 연상하는 것이 우리의 정서인데 반해 단풍철에 사슴사냥을 연상하는 것이 옛 일본인들의 정서였던 듯.
11월 - 일본에서는 '똥'이 12월'오동(梧桐)'의 '동'발음을 강하게 해서 속칭 '똥'이라고 부른다. 원래 일본 화투에서는 이 '똥'이 '12월'이었다고 한다. '오동(梧桐)'을 일본말로 '키리'라고 하는데 '끝'을 의미하는 '키리(切)'와 발음이 똑같아 마지막달인 12월에 배치했다. 그것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 와서 11월로 순서가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똥광(光)'에 있는 닭대가리 같은 동물은 무엇일까? 왕권을 상징하는 전설속의 동물, 봉황이다.
12월 - 비'光'의 갓 쓴 사람은 도대체 누구?
12월의 광(光)에 나오는 갓 쓴 사람은 누구일까? 일본의 유명한 옛 서예가이다. 개구리가 버드나무에 오르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것을 보고 '득도'했다는 한 서예가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비광(光)을 잘 들여다 보자. 다른 광(光)들과는 달리 '光'字가 위쪽에 적혀있다. 이유인즉 비광(雨光) 아래쪽을 보면 '노란 개구리'가 보이는데 노란색이지만 '청개구리'라고 생각하면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거꾸로 하는 청개구리의 설화에 따라 아래로 가야할 '光'字를 거꾸로 위에 적어 넣었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물론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人情이 담긴 한국적 화투... 그러나 '과유불급'을 명심
'고스톱 망국병'이라는 질타를 받고, 저급문화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화투는 질긴 생명력으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한국의 대중문화 중 하나이며, 서민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고 가족, 친척들과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놀이문화이다.
광박에 쓰리고니, 피박에 폭탄이니, 흔들고 싸고... 등등의 고스톱 용어는 듣는 것 자체만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또한 몇 점 더 나겠다며 작은 욕심을 부리다 '박'까지 뒤집어 쓰면서 인생의 쓴맛까지 알게 되고, 게다가 기막힌 반전이 가져다주는 묘미까지 만나게 되면 고스톱에 깊숙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잊지 말자. 과유불급(過猶不及), 넘치면 모자라니만 못하다는 사실을...
앞으로 가족이나 친척들이 모여앉아 화투를 칠 때는 인정(人情)과 감사의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동시에 '동양화 48폭에 얽힌 이야기'도 안주로 곁들이기 바란다. 아울러 본 화투에 관한 이야기는 인터넷 상의 여러 글들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로사 권 rosa@weeklyhk.com>
ⓒ 위클리 홍콩(http://www.weeklyhk.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위클리홍콩의 모든 콘텐츠(기사 등)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