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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 YES to YOUR LIFE] 새롭게 다가갈 시간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12-01-12 11:06:29
  • 수정 2012-01-19 11: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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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6호, 1월12일
추운 겨울밤 인적이 드문 퇴근길에 시퍼런 칼을 든 강도와 마주친 남자가 있었다. 지갑을 들고 달아나려는 강도의 뒤에 대고 방금 생각난 듯 남자가 말했다. "이 추운 날씨에 밤새도록 지갑을 털고 다닐 거라면 몸이라도 따뜻하게 내 코트도 가져가지 그러나?"

두말없이 선뜻 지갑을 준 것도 모자라 도망가는 사람을 불러 세워 코트까지 벗어주려는 친절한(?) 피해자를 멍하니 쳐다보는 십대 강도에게 남자가 덧붙였다. "액수도 크지 않은 돈을 위해 자유를 잃고 감옥에 갈 위험을 감수하는 걸 보면 돈이 정말 다급한 모양이군. 난 지금 저녁 먹으러 단골집에 가던 참인데 혹시 같이 가고 싶다면 대환영이야."

범행의 타깃으로 삼은 남자와 난데없이 저녁을 먹게 된 소년은 그에게 지갑을 돌려주었다. 밥값을 치르고 남은 거스름돈 20달러와 좀 전에 들이댄 칼을 맞바꾸자는 남자의 제안을 수락한 소년은 품속에 있던 칼을 말없이 꺼내놓았다.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훈훈한 우화 같은 이 에피소드는 미국 브롱스에 사는 사회복지사가 퇴근하던 중에 실제로 겪은 경험담이다.

별안간 맞닥뜨린 강도의 섬뜩한 칼에 대처하는 침착하고 대담한 그의 반응은 분명 감탄할 만하다. 어떤 해를 입을지 모르는 아찔한 순간에 괴한의 입장까지 헤아리고 인간애를 느낄 줄 아는 점도 언젠가는 따라해 보고 싶은 묘한 충동이 들게 만든다.

누군가의 지갑을 갈취해 줄행랑을 치는 대신 상상도 못 한 저녁식사를 대접받은 그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는 남자를 만난 이후 생각이 조금은 바뀐 사람이 되어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다.

자신을 아무런 가망 없는 인간으로 여겨왔다면 남자가 베푼 친절을 떠올리며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 '누가 나 같은 문제아를 거들떠나 보겠어?' 절망 속에 살아왔다면 남자가 보여준 관심을 상기하고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 어둡고 추운 골목길에서 야속한 세상을 탓하며 해로운 충동에 시달릴 때 남자와 보낸 저녁을 회상하며 마음을 다잡고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부러 작정한 것도 아닌데 지지리 못난 구석을 보이게 될 때가 있다. 생각하기도 싫은 지난날 내 모습 하나쯤은 다들 기억에 묻어두고 살아간다. 이해가 안 되는 실수를 하고 뻔 한 책임을 회피하고 억지 고집에 빠져 해로운 줄 알면서도 엇나갔던 부끄러운 그 모습이 과거사라는 사실에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쉴 때도 있다.

후회 막급한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런 나를 감싸고 격려해준 누군가의 얼굴 하나가 떠오를 것이다. 모두가 나를 비난할 때 위안을 주고 코너에 몰렸을 때 힘내라고 토닥이며 더 나은 길을 찾게 도와준 수호천사 같은 사람의 희미한 얼굴 말이다.

인생의 가장 낮은 밑바닥에서 타인의 온정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오늘까지 온 우리는 그토록 소중한 기억을 마치 출생의 기억처럼 까맣게 잊은 채 허겁지겁 살아간다. 아니면 그 은인을 다시 볼 수 없게 된 뒤에야 뭔가를 깨닫고 뒤늦게 두고두고 후회하는 경우도 많다.

어김없이 돌아온 새해, 변화를 외치는 소리가 지구 곳곳에서 들려온다.

내 맘에 쏙 드는 사람만 골라 럭셔리한 호의를 베풀고 지갑을 여는 대신, 얼굴만 떠올려도 인상이 구겨지고 짜증과 반감이 몰려오는 소위 내 삶의 골칫덩어리, 웬수, 눈엣가시들을 떠올려보자. 다음에 그를 마주치면 퇴근길 강도를 만난 한 남자가 우리에게 시범을 보여준 것처럼 상식과 예상을 초월한 표정과 제스처로 새롭게 다가가자. 그만한 파격변화도 없을 것이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예의다. 좋아하기 힘든 사람을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건, 분명 사랑이다.


<글·베로니카 리(veronica@coaching-zo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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