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체스 챔피언이었던 러시아의 가리 카스파로프는 ‘인공지능(AI) 쇼크’를 가장 먼저 겪은 사람입니다. 1997년 IBM이 개발한 슈퍼컴퓨터 ‘딥블루’와의 대결에서 완패했습니다. 그의 패배는 고도화된 두뇌 게임에서 인간 챔피언을 무너뜨린 기계의 등장이자 ‘AI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작가이자 강사, 정치가로 변신한 카스파로프는 “기계가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국경제신문 11월3일자 A29면 기사 <AI에 진 체스 챔피언 “이길 수 없다면 함께 가라”>는 카스파로프의 회고를 이렇게 전합니다. “기계와의 대결은 생소함, 불안감, 좌절감을 가져왔다. 게임을 치른 여섯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시계 초침 소리에 조급함을 느끼지 않으며,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일도 없는 상대와 겨루는 것은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주위 환경이나 상황에 따른 감정 변화가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기계와의 싸움은 ‘그 자체로 거대한 공포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옥스퍼드대 인류미래연구소에서 ‘인간과 기계의 미래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연구하는 그가 요즘 강연에서 자주 하는 말은 “이길 수 없다면 함께 가라”는 것입니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프로바둑기사들과의 대결에서 연거푸 완승을 거둔 것을 끝으로 ‘인간과 기계가 경쟁하는 시대’는 끝났고, 기계의 발전은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기계와 기술의 힘을 빌려 인간 능력의 도약대로 삼아야 한다.”
인간과 기계가 대결이 아니라 협업을 할 때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습니다. 2005년 ‘어드밴스트 체스 대회’는 인간과 기계가 짝을 이뤄 참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대회 우승자는 딥블루처럼 체스에 특화된 슈퍼컴퓨터를 갖고 나온 프로 체스기사가 아니었습니다. 컴퓨터 세 대를 동시에 가동한 미국의 아마추어 기사 2명이 우승을 거뒀습니다. 인공지능의 전술적 정확성과 인간의 전략적인 창조성간 조합이 다른 팀들과의 대결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던 겁니다. ‘약한 인간+기계+뛰어난 프로세스’는 어떤 슈퍼컴퓨터보다 강함이 입증된 것입니다.
한국경제신문이 ‘우리가 만드는 미래(future in your hands)’를 주제로 지난주 사흘 동안 개최한 <글로벌 인재포럼 2017>에서는 “AI가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커진 미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놓고 국내외 전문가들 간에 열띤 논의가 벌어졌습니다. 카스파로프의 경험과 관찰은 적지 않은 교훈을 줍니다. “AI 때문에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상황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직업군으로 인간과 기계사이의 협력을 설계하는 분야를 눈여겨봐야 한다. AI는 다양한 인간 활동을 대체하는 단계를 넘어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학영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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