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5호, 3월9일]
혹시 시골생활을 준비하시는 분들을 위해 제가 경험했던 <왕초보의 시골 생활기>를 시간 나는 대로 써..
[제165호, 3월9일]
혹시 시골생활을 준비하시는 분들을 위해 제가 경험했던 <왕초보의 시골 생활기>를 시간 나는 대로 써 볼까 합니다. 제가 경험했던 내용들이 다른 분들에게 모두 적용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약간의 참고는 되지 않을까 합니다. 글이 조금 길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심심풀이로 읽어주시기를...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인생에 있어 소위 말하는 어떤 기회가 저에게 다가 왔습니다. 저는 그 기회를 잡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잡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아파트에서 시골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직장 동료로 이웃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료와 뜻이 맞았기 때문이었고 평소 시골생활을 동경해왔던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에는 귀향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러 참고 사이트가 많지만 16년 전에는 책이나 신문에서 겨우 찾아 볼 수 있을 정도였고 직장생활에 바쁜 몸인데다가 귀향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한다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지요. 어쨌든 시작을 했습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의 집 가족과 동료의 가족들은 적극 찬성을 하였기 때문에 첫 번째 난관은 무사히 통과. 그 다음은 살 곳을 정하는 일이었는데 동료와 저는 시간이 나는 대로 근교의 시골로 다니면서 우리 능력에 맞는 집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몇 달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다녀 보았지만 예상보다 가격이 비싸서 우리의 걸음을 자꾸만 멈추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생각난 것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명절이면 성묘를 가던 어머니 묘소가 있던 지역이 생각났습니다. 다시 시간을 내어 그곳을 찾아가서 복덕방에 들어갔습니다. 하늘이 도왔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집 두 곳이 매물로 나와 있었는데 하나는 38평이고 또 다른 하나는 57평 이라고 하대요.
그런데 매물로 나와 있는 가격이 제가 가지고 있는 예산과 동료가 가지고 있는 예산이 집값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뭡니까? 그래서 이것은 신의 계시라 생각하고 동료는 38평짜리 집을, 저는 57평짜리 집을 각각 계약 하였습니다.
그렇게 계약을 한 후 이사를 하기 위해 아파트 살림을 시골집으로 옮기려고 줄자로 재고 또 재어 봐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가 않는 거예요. 시골집들 대부분이 방 2개에 부엌 하나가 아닙니까? 마루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 규모가 10평을 넘지 못하니 비록 작은 평수의 아파트지만 그 속에 들어있던 살림이 들어갈리가 만무하지요. 고민을 해 보았지만 집을 새로 짓는 방법 외는 달리 대안이 없었어요. 그래서 동료와 저는 있던 집을 헐고 집을 짓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만 집을 구입하는데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투자를 해 놓았으니 집지을 돈이 없더군요.
의논 끝에 친지들에게 돈을 조금 빌리고 회사에 이야기해서 가불을 조금 해서라도 집을 짓기로 했습니다. 예산 때문에 우선 조립식 판넬로 지어 살다가 나중에 좋은 집을 지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집지을 사람을 찾기 위해 이사 갈 집이 있는 시골의 읍내로 나왔습니다. 이리저리 두리번 거려보니 간판이 보였습니다.
「조립식 주택 전문」
2층으로 올라갔더니 뚱뚱하고 얼굴에 개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젊은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사장이라고 하더군요. 응접탁자 유리 밑에는 자기가 지은 집의 사진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24평, 동료 집은 30평으로 짓기로 하고 계약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물론이고 제 동료는 지금까지 집을 지어 본 경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일만 하다 보니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입니다. 통상 계약금은 전체 금액의 10%만 주고 일이 되어가는 공정에 따라 중간 중간에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리 같은 사람으로 착각하고 전체금액의 25%에 해당하는 계약금을 지불하고 말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시골집을 계약하고 다음 날 아파트를 매물로 내어 놓고 출근을 했는데 오후쯤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집을 보러 온 아줌마가 계약을 하자고 저녁에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집을 내 주어야 할 판국이 되었으니 마음이 급했습니다. 동료의 집도 우리 집이 팔리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매매가 되었으니 두 사람 마음이 얼마나 급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루빨리 시골에 집이 완성되어야 이사를 갈 수 있기 때문에 집을 빨리 지어달라고 몇 번 당부를 하고 또 했습니다. 업자는 웃으면서 자기가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맨땅 헤딩하기> 제 1막이 시작되었습니다.
아파트를 비워 주어야 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 저녁에 동료와 시골로 가 보았지만 있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좋은데 새롭게 지어져 있어야 할 집은 보이지 않고 텅 빈 마당만 달빛에 을씨년스럽게 보였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렇게 목이 올가미로 묶여진 상태에서 업자에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 혹 돈이 모자라 공사가 안 되는가 하는 착한 마음에 중도금조로 돈을 조금 건네고... 그러나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업자와의 분쟁으로 소액심판 재판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그래도 날짜가 되어 아파트는 비워주어야 했기 때문에 짐이 많았던 저희 가족은 2대의 트럭에 이삿짐을 나누어 싣고 시골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앞집 덕분에 비어있던 앞집 아래채에 짐을 넣어 둘 수 있었습니다.
이삿짐은 그렇게 해결했지만 우리 가족들의 떠돌이 생활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죠. 일주일간은 누나 집에서 눈칫밥을, 또 일주일간은 여동생 집에서 눈칫밥을... 그러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부엌도 없는 한 달짜리 셋방 하나를 빌려 하숙생활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어쩌다 시골로 가보니 업자가 집의 틀은 올려놓았는데 우리가 생각하던 조립식의 틀이 아니라 마치 공장을 짓듯이 사각 파이프로 만든 골조를 엮어 놓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동물을 키우기 위해 짓는 축사처럼. 그러고도 사람을 보고 빈들빈들 웃는 얼굴을 보니 역겨움이 밀려올라 왔습니다.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건축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솔직히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참다못해 경찰에 진정서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조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담당 경찰이 하는 말이 기가 막혔습니다.
"선생님. 저도 옛날에 업자에게 집을 지으라고 계약금을 주었는데 글쎄 계약금을 가지고 날랐답니다. 이것은 답이 없습니다.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세요. 저 인간들 쥐어 짜 보았자 똥밖에 안 나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지불한 금액 중에서 1/3만 되돌려 받기로 하는 각서를 업자에게서 받고 포기를 했습니다. 신세를 지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아파트 건설업을 하는 친지에게 가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처음부터 자기를 안 찾아 왔다는 꾸지람을 1시간 듣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소개받은 사람에게 일을 맡겼더니 약 40일 만에 벽돌로 적조하고 스레이트를 지붕으로 올린 집 두 채가 각각 완성되었습니다.
<글 : 구행복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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