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86호, 8월17일]
광개토대왕릉비와 광개토대왕릉
장수왕릉을 관람한 후 근처의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로 향했다.&nbs..
[제186호, 8월17일]
광개토대왕릉비와 광개토대왕릉
장수왕릉을 관람한 후 근처의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로 향했다. 차로 10여분이 채 못 되게 달려 도착한 그곳은 토끼풀이 지천에 깔렸고,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오얏나무 등 과실수들과 버드나무가 왕릉과 왕릉비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몇몇은 유적지 탐사를 떠났고, 할머니 몇몇 분은 다시 차 안에 남아계 셨다.
과수원 오솔길을 10여분 걸어 대왕비에 도착했다.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불리는 이 비석에는 44행에 대체로 각각 41자씩을 담아 총 1,775자의 예서체 한자가 새겨져 있다는데, 오랜 세월 동안 노천에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힘든 상태였다.
비문을 연구하고 있던 일본인 스에마스는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을 두고,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고 한다.
이후 1914년 신채호가 현지에 가서 직접 비석을 확인하고, 비문의 "결자(缺字)에 석회를 발라 첨작(添作)한 곳을 발견했고, 1930년대 말 정인보는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그는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고구려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하여 일본 학자의 견해를 반박했었다.
광개토대왕비가 비바람에 마모되기 전 또 일제가 조작하기 이전의 초기의 탁본이 있었다면 명쾌하게 판명이 되련만 안타깝기 그지없다. 역사적 유물의 소중함을 이렇게 잃고 나서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뼈저리게 후회하니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 비문은 현재 방탄유리로 보호되고 있는데, 독일에서 50억을 들여 수입 설치한 것이란다. 유리 바깥쪽에서는 괜찮지만 상주하는 관리자 한 명이 사진촬영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었다(첨부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온 것임).
약 300미터쯤 떨어진 광개토대왕릉으로 이동하는데, 이곳에서도 몇 몇 분은 더 이상 가기를 포기한 채 버스로 돌아가고, 우리 아이들 둘과 Jay, 어르신 두 분만 왕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담하게 닦여진 길옆으로 늘어선 과실수에는 크고 작은 과일들이 빼곡하게 열려있었다. 이곳은 원래 300여호의 중국인 집들과 옥수수 밭 등 농지였으나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이들 모두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한다. 사실 왕릉에 쓰인 돌을 떼어다 집을 짓고, 왕릉 인근의 유적지를 파헤쳐 옥수수 밭으로 일구며 살던 그 300여 호의 주민들이 소중한 유적을 훼손시킨 장본인들 아닌가. 우리 대왕의 묘를 파헤치고 훼손했던 그들을 생각하니 가슴에서 열불이 인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역사마저 왜곡당한 채 억울함만 호소하고 우리가 얼마나 한심스럽단 말인가.
역사의 풍화에 찌들린 광개토대왕릉비와 장군총을 뒤로하고 버스로 돌아와 차에 오르니 남아있던 할머니들 얼굴에 따분함이 가득했다.
버스는 이제 2시간여를 달려 통화(通化)를 향해 달렸다. 비류수(沸流水)가 동서로 나누고 있는 도시 통화는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의 중간 지점이고, 이곳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그 '기막힌' 기차를 타야했다.
'우리가 피난민이야'
통화에 도착하니 밤이 되었다. 장구한 세월의 역사의 먼지를 온몸으로 뒤집어썼으니 호텔로 돌아가 뜨거운 물에 푹 잠겨 목욕이라고 했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이 밤중에 기차를 타고 밤새 달려야 한다.
어두컴컴한 통화 기차역엔 비에 젖은 중국인들로 북적거렸다. 평소에도 비릿한 냄새가 역겨운 그들에게서 도저히 참기 힘든 냄새가 풍겨져왔다.

가이드로부터 표를 받아드니 60여 위안짜리 기차표였다. 침대칸인데 어떻게 100위안도 안할까? 6명이서 한 칸에서 잔다는데 이 돈 받아서 운행이 될까 싶을 정도로 너무 싸서 괴이한 생각마저 들었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 일행은 그 무거운 짐을 끌고 '이런 게 전쟁 통'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아비규환인 중국현지인들 틈에 끼여 정신없이 침대칸으로 달려갔다. '침대칸에만 오르면 이런 사람들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겠지'하며 기차에 올랐다.
"Oh my God!!" 이럴 수는 없었다. 침대칸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내 눈 앞에나 난 건 복도쪽으로 쭉 내뻗은 중국인의 시커먼 발바닥 이었다. 밤새 10시간을 달려야 하는 이 기차는 좁디좁은 한 칸에 침대 6개가 3층으로 쌓여 있었고,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마저 없어 훅하고 풍겨오는 역겨운 냄새에 속이 미슥거렸다. 비참하다 못해 처참한 광경 앞에서 우리 일행은 그 자리에서 그만 얼어 붓고 말 았다.
<글 : 로사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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