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호, 11월 23일]
개발설계를 많이 하면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었고 제가 설계하여 만든 기계가 완성되어 시운전할 때..
[199호, 11월 23일]
개발설계를 많이 하면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었고 제가 설계하여 만든 기계가 완성되어 시운전할 때는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가슴을 졸이며 기계 근처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사무실이나 다른 곳을 빙빙 돌면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작업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처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마땅히 다른 방법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설계를 시작하는 처음부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서 시운전을 통해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빠른 시간 내에 저렴한 비용으로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일어 날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 만일 문제가 일어날 경우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대책까지 미리 예상한 후 그 방식을 적용하여 설계를 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을 하면서 저절로 체득한 문제해결 방식이 자연스럽게 아들의 학습과 미래에 대한 분석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에 따라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일에 집중할 수 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의 생각으로는 아들을 이렇게 방치해 두어서는 아들의 미래가 굉장히 불투명할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어떻게 하든 문제를 찾아내고 적당한 대책을 만들어야 작은 희망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새로운 학습지를 찾아 나서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아들이 받아 보았던 에이 플러스 학습지는 제가 보기에 중간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는 학습지여서 시내에 있는 학교나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 있는 아이들이 배우는 수준과 비교해 볼 때 학력향상에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크게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여서 제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고는 신문을 보거나 제가 일을 하러 다녔던 회사 근처에 있는 학원들뿐이었습니다.
당시 근처에 있던 학원들 중에는 서울에서 유명강사를 초빙하여 세미나 같은 행사를 많이 열었는데 일이 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시간의 여유가 있었던 저는 되도록 이렇게 열리는 세미나에 많이 참석하여 목말라 있던 정보를 얻기 위하여 애를 썼습니다.
서울에서 왔다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면서 지방에 있는 순진무구한 학부모들에게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귀가 솔깃해지는 부분도 많았지만 반대로 부담이 가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통해서 그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정보와 현실에 대해 큰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일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것과 지금 서울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으며, 학부모들은 어떻게 학생들을 뒷바라지 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저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몇 가지 빌리자면 전국의 고등학교가 2,000개가 넘는다는 것, 단 1명이라도 서울대학 입학생을 배출한 학교가 900개 정도 된다는 것 등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제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던 것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해 왔던 서울대학 단과대별 경쟁률이었는데 예를 들어 경영대학을 말하자면 선발인원이 240명으로 경영대학 하나를 보면 많은 숫자이지만 전국의 수능응시인원이 60여만 명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240명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극소수에 해당하는지 그 이야기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면서 등줄기로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전율이 흘렀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나오는 제 발길은 한없이 무거웠고, 그나마 시내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보다 시골구석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도 모른 채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제가 한없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평범한 학부모의 한사람으로 아들이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면 되지 가끔씩 방송에 보도되던 학부모들처럼 학원이니 과외를 하면서 정신없이 허둥대는 것이 그저 남의 일처럼 보였던 저에게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작지만 큰 변화는 찾아왔고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3년 전의 과외공부
제가 아들의 학업 문제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아들이 시골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하는 문제로 약간의 고민을 했지만 당시 저희 가족이 처했던 현실에서 이웃에 살던 학생들이 대부분 시내중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보면서도 집 근처에 있는 시골중학교로 진학을 결정한 이유는 중학교 성적이 대학진학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과 3년간 시내로 통학을 하는 문제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과 타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결정하고 회사 일에 매달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가 아들이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제대로 쳐다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제가 창업했던 회사를 친구 회사로 통합하고 그 회사의 일을 전문적으로 하게 되면서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제가 맡았던 업무가 대부분 사라지고 제 본연의 일인 설계 업무만 하게 되어 시간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회사가 그렇게 된 것이 아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 것 같아서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할까요?
당시 저희 가족이 의논 끝에 아들을 시내의 중학교로 보내지 않고 시골중학교에 보내기로 한 것은 아들과 아내의 생각보다 제 생각이 결정적이었는데 제가 아들을 시골의 중학교로 보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제 어릴 적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이 되는 지금으로부터 43년 전 제가 경험했던 <지독한 공부>에 대해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이니까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인 1963년이었고 그때 저의 학급 담임을 맡고 계시던 한 규성 선생님이 저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당시 어려웠던 집안 사정 때문에 점심을 가져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학교에
서는 강냉이로 만든 떡과 우유를 나누어 주었는데 우리 집 형편을 알고 계신 선생님은 나누어주고 남은 강냉이떡과 우유를 저에게 모두 싸 주었고 그 떡과 우유는 가난했던 우리 집에 중요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글 : 구행복 9happy0508@hanmail.net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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