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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의 좌충우돌 시골생활기 33편 - 시골에서의 자녀 교육 문제 3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7-12-06 14: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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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0호, 12월 7일]   어려웠던 유년시절, 공부에 대한 추억   그리고 방과 후 저는 거의 매일 선생님 댁..
[제200호, 12월 7일]

  어려웠던 유년시절, 공부에 대한 추억

  그리고 방과 후 저는 거의 매일 선생님 댁으로 가서 선생님의 일을 도와 드렸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유전적 영향으로 글씨체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이러한 저의 장점을 발견하신 선생님은 가난한 학생들이 많았지만 그 학생들보다 강냉이 빵을 많이 가져가는 일로 제가 미안하지 않도록 저에게 많은 일을 맡겼습니다.

  당시 제가 했던 일은 시험지를 채점하고 펜글씨로 통신표에 성적을 기록한 후 성적표의 통신란에 선생님이 불러주시는 대로 글을 쓰는 일을 하거나 다음날 아침 칠판에 적을 문제를 뽑아 주시면 그것을 다음 날 아침 일찍 학교로 가서 칠판에 판서하는 일을 하곤 했습니다.  요즘의 수준으로 생각하면 일종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일을 마치고 나면 거의 매일 선생님 댁에서 우리 집에서는 먹을 수 없는 맛있는 반찬으로 저녁밥을 먹었는데 다정하셨던 사모님은 집에 가져가도록 별도로 음식을 준비해 주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한 선생님께서는 붓글씨를 매우 잘 쓰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도 제가 글씨를 잘 쓰는 이유는 유전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한 선생님의 글씨에서 받은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6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바뀌었고 윤 선생님이 담임이 되셨습니다.  제주 출신으로 얼굴이 검고 윤곽이 영화배우 더스틴 호프만처럼 생겼었는데 얼굴에 주근깨가 많았던 윤 선생님의 아들이 우리 반에서 같이 공부를 하였습니다.

  6학년이 되자 중학교 입학 문제가 발등의 불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중학교 입학은 지금처럼 무시험으로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마다 독자적으로 입학시험을 치러 학생을 선발하는 구조로 당시 부산에서 일류중학으로 불렸던 부산중학교와 경남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늘날 상위권 대학의 경쟁만큼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했습니다.

  입시 제도가 그렇다보니 위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초등학교 6학년들의 과외공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심했는데 당시의 과외는 지금처럼 학원에서 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부분 학교 선생님들의 집에서 이루어졌고 가난한 우리 집 형편 때문에 저는 과외를 한다는 생각은 고사하고 내가 과연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까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1년 먼저 졸업한 아이들 중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졸업 후 중학교 가는 것을 포기하고 공장으로 일하러 간 아이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 선생님으로부터 저의 형편과 장점을 전해 들었던 윤 선생님은 저에게 5학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남은 강냉이 빵과 우유를 집으로 가져가게 하셨고 통지표 기록하는 일과 칠판에 판서하는 일을 시키셨으며, 거기다가 한 가지 더 저에게 결정적인 혜택을 주셨는데 그것은 저에게는 과외비를 받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선생님 댁에서 과외 공부하던 반 친구들과 같이 공부를 하라고 하셨고 나아가 과외공부에 필요한 교재비용도 받지 않았습니다.

  당시 6학년 담임선생님의 경우 자기 반에서 일류중학에 몇 명 입학하느냐가 선생님들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고, 이로 인해 실력을 인정받은 선생님에게는 많은 학생들이 과외를 받았는데 이것은 선생님들이 학부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일인 동시에 과외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적 이득이 생기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이들을 가르친 후 학교에 나와 수업을 하고 다시 밤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선생님에게 사명감이 없었다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여 저는 아침저녁으로 윤 선생님 댁으로 가서 친구들과 같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선생님이 시키시는 여러 가지 일도 잘 처리하였습니다.

  신새벽, 파출소로 끌려간 사연

  어느 여름 날 아침. 시계가 없었던 우리 집 시계는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울리는 근처 성당의 종소리였습니다. 그 날도 성당의 종소리를 들은 어머니께서 저를 깨우셨고 저는 습관처럼 졸린 눈을 비비면서 무의식적으로 지난 밤 미리 준비해둔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때가 13살이었으니 한참 곯아떨어져 있을 새벽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고문이었는지 지금도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토록 힘든 공부를 할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선생님 댁은 우리 집에서 약 1km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새벽길을 졸면서 비몽사몽간에 선생님 댁 앞에 도착하니 다른 날 같으면 현관에 불이 켜져 있고 대문이 열려 있어야 하는데 그날은 어떻게 된 일인지 불도 꺼져 있고 대문도 닫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친구 한 명도 도착하였지만 현관의 불이 켜지지 않아 우리는 선생님이 피곤하여 아직 일어나시지 않았는가 보다 하고 담벼락 옆에 있는 평상에 앉아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신나게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불이 번쩍번쩍하면서 누군가 우리를 깨우는 것이 아닙니까?  놀라서 일어나보니 손전등 불이 번쩍이면서 사람들이 두리번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우리들에게 뭐라고 물어보더니 다짜고짜 우리더러 신발을 신고 따라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글 : 구행복 9happy0508@hanmail.net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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