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1호, 12월 14일]
잠결에 정신없이 사람들을 따라갔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가까운 파출소였고 우리를 데리고 온 사람은 야경을..
[제201호, 12월 14일]
잠결에 정신없이 사람들을 따라갔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가까운 파출소였고 우리를 데리고 온 사람은 야경을 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통금이 있었고 그날 아침 제가 선생님 댁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3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황당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아침 어머니께서 잠결에 들었던 성당의 종소리는 새벽에 아들을 깨워야 한다는 긴장감으로 꿈결에 들었던 종소리를 성당의 종소리로 착각을 하고 저를 깨우셨고 시계가 없었던 우리 집에서 시간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 그냥 선생님 댁으로 갔던 것입니다.
저와 친구를 좀도둑이나 불량아로 착각한 방범대원 때문에 졸지에 파출소에 잡혀왔지만 우여곡절 끝에 선생님 댁에서 아침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의 도움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선생님 댁에서 무료로 공부를 하였고 드디어 때가 되어 우리 학교에서는 예년과 달리 저를 포함하여 가능성이 있는 5명을 부산중학교에 지원을 시켰습니다. 물론 제가 부담해야 할 지원에 필요한 여러 가지 비용도 선생님이 모두 부담을 하셨습니다.
입학시험이 있던 날. 저는 일을 하러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큰 누님과 함께 초량동에 있는 부산중학교로 가서 시험을 치렀습니다.
시험지를 받았으면 당연히 떨리고 긴장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떨리거나 긴장되지가 않고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꼭두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졸린 눈으로 수없이 쳐다보고 또 쳐다보던 문제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는 시험이 끝나면 답안지만 제출하고 시험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들에게 가져다주고 돌아와 다음 시험을 치르는 방식이었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은 시험지를 받으면 채점하여 점수를 가늠해 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답안지를 만들어 팔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교시가 끝난 후 시험지를 가지고 밖으로 나와 누님에게 드리니 누님이 하시는 말씀.
"잘했다! 1개 틀렸더라. 사람들이 말하는데 3개 이상 틀리면 합격이 어렵다 카더
라"
5명이 지원을 하였지만 저를 포함하여 3명만 부산중학교에 합격을 하였고 합격한 사람들은 합격자 발표자 있었던 다음 주 아침 전교생 조회시간에 앞으로 불려나가 큰 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윤 선생님을 통해 제가 얻은 것은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인 제가 어떤 목적의식이나 현실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었겠으며 반드시 부산중학교에 합격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는 일인지 어느 누구도 저에게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고 실제로 제 주변에서 그런 과정을 거쳐 성공한 사람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환경이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요즘에 와서야 깨닫게 됩니다.
저는 그저 선생님이 시키시는 대로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더니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 오직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반드시 목표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제 아들이 시골중학교에 진학하더라도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되짚어 보는 시골생활 그리고 자녀교육
저의 세대에 태어난 사람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는 오직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 뿐 가난했던 가정형편 때문에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고 대학이라는 곳은 구경도 하지 못한 채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중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들 하나를 두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저희 부부가 다가오는 미래에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꿈을 이룰 수 있었던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아끼고 또 아끼는 방법만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절약하면서 살아왔지만 기본적으로 대학졸업이라는 학력이 없었던 까닭에 학력을 요구하는 분야에 진출하기가 어려웠고 거기다 삶의 기초가 되어 주어야 할 기본자산이 없던 상황에서 맨손으로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재(理財)에 뛰어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어서 매월 받아오는 적은 월급만으로 재산을 늘여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많이 회자되고 있는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말이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제 자신의 처지였다는 것을 생각하니 이 말이 가진 의미에 더욱 공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허둥대며 살아오던 중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저에게도 삶의 역정에 큰 변화를 예고하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것은 도시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생면부지의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된 일이었습니다. 그 때가 제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90년이었습니다.
제가 들어서 알고 있기로는 보통 사람들의 경우 자녀 교육을 위해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를 하고 시골로 이사 가서 살고 싶지만 자녀들의 교육 때문에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당시 저희 가족은 아들의 교육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세상의 순리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아들의 교육문제가 시골로 이사가는 일을 결정하는 데 큰 장애요인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가족은 졸지에 아무 연고도 없는 시골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아들은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시골 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골로 이사를 오기 전만 하더라도 우리 가족이 이런 시골에서 살아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시골에서 살아보니 시골생활이라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그런 환상적인 삶이 아니라 불편하기 짝이 없고 힘든 노동이 필요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글 : 구행복 9happy0508@hanmail.net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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