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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의 좌충우돌 시골 생활기 37편 - 시골에서 명문대학 보내기 2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8-01-03 11:5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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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4호, 1월 4일]   일을 마치고 나면 거의 매일 선생님 댁에서 우리 집에서는 먹을 수 없는 맛있는 반찬으로 저녁밥을 먹었는데, 다..
[204호, 1월 4일]

  일을 마치고 나면 거의 매일 선생님 댁에서 우리 집에서는 먹을 수 없는 맛있는 반찬으로 저녁밥을 먹었는데, 다정하셨던 사모님은 집에 가져가도록 별도로 음식을 준비해 주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한 선생님께서는 붓글씨를 매우 잘 쓰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도 제가 글씨를 잘 쓰는 이유는 유전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한 선생님의 글씨에서 받은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6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바뀌었고 윤 선생님이 담임이 되셨습니다.  제주 출신으로 얼굴이 검고 윤곽이 영화배우 더스틴 호프만처럼 생겼었는데 얼굴에 주근깨가 많았던 윤 선생님의 아들이 우리 반에서 같이 공부를 하였습니다.  6학년이 되자 중학교 입학 문제가 발등의 불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중학교 입학은 지금처럼 무시험으로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마다 독자적으로 입학시험을 치러 학생을 선발하는 구조로 당시 부산에서 일류중학으로 불렸던 부산중학교와 경남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늘날 상위권 대학의 경쟁만큼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했습니다.

  입시 제도가 그렇다보니 위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초등학교 6학년들의 과외공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심했는데 당시의 과외는 지금처럼 학원에서 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부분 학교 선생님들의 집에서 이루어졌고 가난한 우리 집 형편 때문에 저는 과외를 한다는 생각은 고사하고 내가 과연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까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1년 먼저 졸업한 아이들 중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졸업 후 중학교 가는 것을 포기하고 공장으로 일하러 간 아이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 선생님으로부터 저의 형편과 장점을 전해 들었던 윤 선생님은 저에게 5학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남은 강냉이 빵과 우유를 집으로 가져가게 하셨고 통지표 기록하는 일과 칠판에 판서하는 일을 시키셨으며, 거기다가 한 가지 더 저에게 결정적인 혜택을 주셨는데 그것은 저에게는 과외비를 받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선생님 댁에서 과외 공부하던 반 친구들과 같이 공부를 하라고 하셨고, 나아가 과외공부에 필요한 교재비용도 받지 않았습니다.

  당시 6학년 담임선생님의 경우 자기 반에서 일류중학에 몇 명 입학하느냐가 선생님들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고, 이로 인해 실력을 인정받은 선생님에게는 많은 학생들이 과외를 받았는데 이것은 선생님들이 학부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일인 동시에 과외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적 이득이 생기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이들을 가르친 후 학교에 나와 수업을 하고 다시 밤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선생님에게 사명감이 없었다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여 저는 아침저녁으로 윤 선생님 댁으로 가서 친구들과 같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선생님이 시키시는 여러 가지 일도 잘 처리 하였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의 도움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선생님 댁에서 무료로 공부를 하였고, 드디어 때가 되어 우리 학교에서는 예년과 달리 저를 포함하여 가능성이 있는 5명을 부산중학교에 지원을 시켰습니다.   물론 제가 부담해야 할 지원에 필요한 여러 가지 비용도 선생님이 모두 부담을 하셨습니다.

  입학시험이 있던 날. 저는 일을 하러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큰 누님과 함께 초량동에 있는 부산중학교로 가서 시험을 치렀습니다.

  시험지를 받으면 당연히 떨리고 긴장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떨리거나 긴장되지가 않고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꼭두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졸린 눈으로 수없이 쳐다보고 또 쳐다보던 문제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는 시험이 끝나면 답안지만 제출하고 시험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들에게 가져다주고 돌아와 다음 시험을 치르는 방식이었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은 시험지를 받으면 채점하여 점수를 가늠해 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답안지를 만들어 팔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     니다.

  2교시가 끝난 후 시험지를 가지고 밖으로 나와 누님에게 드리니 누님이 하시는 말씀 "잘했다! 1개 틀렸더라. 사람들이 말하는데 3개 이상 틀리면 합격이 어렵다 카더라"  5명이 지원을 하였지만 저를 포함하여 3명만 부산중학교에 합격을 하였고 합격한 사람들은 합격자 발표가 있었던 다음 주 아침 전교생 조회시간에 앞으로 불려나가 큰 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윤 선생님을 통해 제가 얻은 것은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인 제가 어떤 목적의식이나 현실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었겠으며 반드시 부산중학교에 합격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는 일인지 어느 누구도 저에게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고 실제로 제 주변에서 그런 과정을 거쳐 성공한 사람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환경이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요즘에 와서야 깨닫게 됩니다.

  저는 그저 선생님이 시키시는 대로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더니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 오직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반드시 목표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제 아들이 시골중학교에 진학하더라도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글 : 구행복 9happy0508@hanmail.net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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