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과 상환은 홍콩이 개항한 후 발전했다. 개항 초기, 홍콩정부는 조정에서 보호하는 홍콩의 북쪽 연안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1841년 6월 최초로 땅을 매각했다. 그 중 바닷가 인근 지역과 시가지역은 모두 서양인들 수중에 들어고, 다행히 시장지역은 중국인이 보유했다. 이 때문에 전자는 서양인들의 상주지역이 됐고, 후자는 중국인 상주지역이 되어 경계가 뚜렷하고 분명하게 됐다.
같은 해 11월 홍콩정부는 아빈리협곡(雅賓利渠)과 기련나리협곡(忌連拿利渠)사이의 산중턱을 정부전용으로 삼으며 정부산(政府山)」이라고 하였다.
이 지역 산중턱에는 Sir Henry Pottinger의 관저, 부 행정부(현 정부기관인 East Wing 소재지. 1848년 준공), 미리포태(美利砲台), 총독부(현 예빈부공), 아빈리(雅賓利) 정부숙소, 동식물원 공원(兵頭花園) 그리고 성요한 성당 등이 끊임없이 건축되었다.
산기슭에는 대회당(大會堂)과 은행, 외국상점 공부빌딩이 건축 되었으며, 이 지역의 발전은 홍콩의 정치. 경제 발전과 함께 했다.
홍콩에서 가장 먼저 개척된 간선도로는 헐리우드 로드와 퀸스 로드이다. 전자는 산중턱에 건설되어 태평산지역을 관통하여 중환과 상환을 연결 시켜주고, 후자는 해안선을 따라 뻗어 나있어 홍콩 북쪽연안의 주요 간선이 되었다.
신도시는 이 두 도로사이의 기복이 있는 중턱에 건설 되었다. 헐리우드 로드에는 층층이 겹쳐있는 2층 높이의 서양식 건물 중에는 경찰서, 순리부(巡理府 재판소)와 역다리감옥(域多利)등 거대한 건축물들이 뒤섞여 있었다. 개항초기 총순리부는 경찰업무와 감옥을 겸하여 관리했다.
이 거대한 건물은 경찰업무와 재판, 수감 3가지는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Wellington Street과 Pottinger Street 경계지역에는 홍콩 최초의 천주교 성당이 우뚝 솟아있다. 이곳은 최초로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넘어온 포르투갈인과 아일랜드 주둔 병사들이 미사를 드리는 장소였으며, 후에 수용공간이 좁아 1888년 새로운 성당을 건축하게 됐다.
20세기에 들어선 후 홍콩에 들어와 사는 서양여인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숙박과 시설의 부족현상은 심각해졌다.
Queen's Road 중에 해안을 따라 난 쪽은 중환의 황금지역이었는데, 홍콩의 큰 상사는 이때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외국상사의 정문은 Queen's Road를 향하고, 해변을 등지고 있었다. 일부 상사는 그 유리한 형세를 타 부두를 건설하여 하역장을 공급했다.
1860년대 말, 정부는 이곳에 최초의 해안길가를 건설했는데, 홍콩을 경유해 반출하는 무역이 왕성하게 발전함에 따라 상점들이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1856년 광주상업관리구역이 크게 번성하면서 총본부는 광주에 외국상사가 계속해 들어올 것으로 보여 토지 형태 변경이 간절히 필요했다.
중환의 토지는 감히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해양매립이 곧 유일한 출구가 되자 1850년대 홍콩총독 John Bowring이 중환의 해양매립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외국상사의 반대서명운동에 부딪히면서 취소되었다. 30년 후, 해양매립이라는 큰 계획은 Catchick Paul Chater(1846~1926)에 의해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홍콩정부는 홍콩은행을 이용, 전방의 새로운 토지매립에 「동상광장(銅像廣場, 현재의 Statue Square)」을 계획했다. 광장중앙은 대영제국의 최고 통치자인 빅토리아여왕의 동상을 세웠고, 그 주위엔 그녀의 아들, 손자와 며느리 그리고 식민지의 관리가 빼곡히 둘러싸고 있어 수많이 별들이 달을 에워싸고 있는 듯 한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는 영국이 홍콩의 종주국으로써의 지고무상한 지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왼쪽에는 웅장한 최고법원이 우뚝 솟아있고, 오른쪽에는 Queen's Road와 태자길(太子行)이 있다. 광장 좌측에 있는 최고법원 옆에는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운동인 크리켓의 구장과 회의소가 있으며, 그 앞에는 홍콩의 영국인상류사회 최고급회의소인 홍콩회의소가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동상광장은 식민지색채가 짙고, 사람을 위협하는 위엄 있는 태도로 가득했다. 일본강점시기, 동상은 모두 옮겨졌다. 전쟁 후엔 지배인인 측신의 동상만이 남았고, 식민지색채는 크게 퇴색되었다.
영국의 식민지 홍콩. 그 시의 중심, 특히 핵심 지대의 계획과 구성은 영국의 다른 식민지도 사정은 비슷하다. 각 영국령의 식민지는 모두 정부전용지역을 개척했다. 총독부, 정치부빌딩, 법원, 대회당(문예), 성공회 예배당(영국대표국교), 크리켓회 등의 시설 모두 그 근처에 위치해 있고, 식민지의 중심 지역을 개발해 영국 상류사회인사의 생활 풍습과 욕구를 만족시켰다. 일찍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콜카타 모두 이와 같았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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