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성들은 홍콩에 와서 무엇을 했나?1916년 창립한 메이부인 부녀회는 이름그대로 특별히 부녀자들을 위해 설립된 단체다. 홍콩 개항초기 홍콩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남성이었고 그 중 부인과 아이를 대동한 사람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외국국적의 여성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기 유럽사회가 변화하면서 서양여성들은 밖에 나가 일하기 시작했고, 교육을 전하고 여행을 하며,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등의 운동이 일어났다. 젊은 영국여성들은 새로운 생활을 찾아 영국에 속한 식민지로 가서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이렇게 홍콩에 온 여성들은 홍콩사회에 새로운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홍콩에 첫 번째로 여성 전용 빌딩인「메이부인 부녀회」를 건설하기도 했다.
부녀회의 탄생
홍콩에 온 외국여성의 수는 19세기 후 두 배로 증가했다. 그녀들은 홍콩에 와서 간호사, 교사, 타이피스트 혹은 선교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러나 초기의 개인단체에는 여성을 위한 임시직원 숙소가 드물었고, 그 밖에도 당시 홍콩에는 여성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매우 부족했다. 홍콩여성청년회 창립자인 루시에어(Lucy Eyre)는 이 점을 고려해 여성청년여관 건설을 제안했으나 애석하게도 그녀가 1912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 생전에 다하지 못한 염원을 당시 메이핸리 총독부인(Lady May)이 후원하면서 그녀의 이름을 딴 부녀회가 탄생했다.
메이부인의 원래 이름은 Helena Barker이며, 1863년 영국 스코틀랜드 생으로 아버지는 홍콩주재 영국군 사령관 바커소장(Lieutenant General Barker 산 정상의 바커도(白加道)는 바커소장의 이름을 따 지은 것이다. 정무사 사장관저와 전 홍콩주재 영국군사령관저 역시 바커도에 있다)이다. 1890년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홍콩에 왔고, 이듬해 아버지의 비서 메이핸리와 결혼했다. 중구(中區)와 반산(半山)에 현존하는 메이가(梅氏)와 관련된 고적으로는 메이도(May Road)와 홍콩대학매당(May Hall) 등이 있다. 1923년 황후상 광장에 메이핸리의 동상이 세워졌으나 일제강점시기 철거되었고, 후에 이를 찾아오지 못했다.
메이핸리는 또한《廣東方言入門》과《在香港乘快艇遊覽》을 저술하기도 했다. 메이핸리는 일찍이 홍콩경찰관 임기시기인 1912년 제15대 홍콩총독이 되어 홍콩에서 30년 가까이를 열성으로 일하였다. 메이 부부는 각각 홍콩청년회와 여성청년회를 주관하는 등 자선사업도 하였다.
1914년 초, 카두리(Ellie Kadoorie)는 메이부인이 부녀회를 창립한다는 것을 듣고 건축비용의 절반(1만5천원)을 기부하면서 건물명을 반드시 메이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을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은상(殷商) 하감당은 이러한 계획에 호응하여 나머지 절반의 건축비를 기부하였고 이 외에, 류주백(劉鑄伯), 진계명(陳啓明) 그리고 하동(何東)등 부상(富商)들이 잇따라 기부를 하였다. 메이핸리 총독의 지휘 하에 찾아낸 부녀회의 소재지인 중환 화원도는 총독부와 가깝고, 위로는 병도화원, 아래로는 성요한 성당, 옆에는 산정상의 케이블카 종점과 이웃해 있으며, 부두와도 멀리 않은 곳으로 지리적 우세를 차지했다. 또한 홍콩을 지나는 여행객에게 편리함을 주고 사교활동을 개최하기에도 좋은 곳이었으며, 항상 부녀회를 왕래하는 총독 부인에게 있어 그야말로 유리한 곳이었다.
부녀회 본 건물은 Denison, Ram & Gibbs 회사에서 설계하였고, 르네상스형식을 빌어 건축되어 높은 3층으로 주로 흰색을 많이 사용하여,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고상하고 우아하였다. 이 건물은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운 중환에서 하나의 평온하고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1916년9월12일 메이부인 부녀회(The Helena May Institute, 후에 1974년 The Helena May로 약칭함)가 준공되었고, 메이부인이 제1대 위원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총독 부인이 부녀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전통이 되었다.
활동과 봉사 부녀회 설립 초기, 봉사대상은 유럽여성이었다. 당시 유럽인이 아닌 유일한 회원은 건축비기부자 하동의 딸인 하금자(何錦姿)여사(중국인 여성을 위한 봉사는 주로 1920년 설립된 중화기독교여성청년회에서 제공하였다.)였다.
부녀회가 일반사회단체와 구분되는 것은 부녀회는 기독교여성청년회와 여관 그리고 사회단체의 특색을 골고루 섞어 이 기능들이 하나가 되게 하여 서양여성들에게 쾌적하고 편리한 활동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부녀회는 또한 20세기 초 홍콩 서양인 사교와 문화생활 활동을 하였다. 부녀회 빌딩 내부에는 도서관, 예배당, 활동실, 화원 그리고 식당 등의 시설이 설비되어 있었고, 정기적으로 집회를 열어 강좌를 개설하고 경전을 읽었으며, 음악회와 전시, 자선활동을 하였다.
부녀회는 또한 무도회를 열고 회식을 하며 남자손님의 참여를 환영하였다. 부녀회에서 유일하게 엄격히 규정한 것은 밤에 숙소를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많은 남자들이 숙소에 몰래 숨어들어 왔으나, 운이 없게도 모두 되돌아가야했다.
부녀회 활동 초기 12개의 숙소가 있었는데. 대부분 독신이거나 중산층의 유럽직업여성과 홍콩을 지나는 여행객에게 숙박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숙소는 늘 부족하여 후에 내부수리를 통해 증축공사를 하였다. 1929년 클리멘티 총독(Sir Cecil CLEMENTI)부인의 추진 하에 구룡에 지부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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