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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역사 산책] 병두화원(兵頭花園 Bing Tau Garden) 2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9-06-11 12:27:17
  • 수정 2009-06-11 12: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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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3호, 6월12일
홍콩의 조로아스터교 상인(巴斯商人 Parsee)

 홍콩동식물공원 안에는 철로 만든 짙은 녹색의 평정자(平頂亭)가 하나 있다. 1864년 군악대 연주를 위한 장소로 파시(조로아스터교) 사회단체에서 홍콩정부에 선사한 것이다.

정자 밑 받침대에는 PARSEE COMMUNITY라는 문구가 있으나 그 자취가 흐릿하다. 파시인과 홍콩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오래전 홍콩에서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으나 현재는 홍콩시민에게 이 민족은 생소하다.

인도에서 온 파시인들의 조상은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인들로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를 신봉하였으나, 회교도에 전입되면서 그 세력이 약해졌고, 결국 인도의 서쪽 기슭으로 도망쳐 내려와 정착하였다.

이들은 인도에 거주하면서 점점 인도화 되었고, 영국인들이 인도에 들어왔을 때, 좋은 무역동반자의 관계를
형성하였다. 영국인을 따라 중국 화남지방에 들어와서 상업 활동을 한 그들의 종적은 광주, 마카오, 홍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이 상인이었던 이들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전기까지 홍콩시장에서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1841년 6월 홍콩 개항 후 처음으로 토지 경매가 이뤄지자 홍콩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진 4명의 파시인이 앞 다투어 땅을 매입하였다.

1860년 홍콩에 등록된 73개의 상가 중 17개의 상가가 파시인 소유였다. 1864년 홍콩 회풍은행위원회가 성립되었고, 13명의 회원 중 3명이 파시인 이었다는 사실로 그들의 경제세력을 짐작할 수 있다.

팔란지양행(Cowasjee Pallanjee & Co.)은 파시인이 경영하는 유명한 무역상사로, 1941년 광주에서 홍콩으로 옮겨왔다.

초기에는 아편, 조미료, 비단 등이 주 품목이었고, 후에는 면사(棉紗)로 전환하여 홍콩의 중요한 면사상이 되어 홍콩의 면사 시장을 좌지우지하였다. 19세기 내내 팔란지양행은 날로 번창하였고, Queens Road에 본점을 설립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조용히 홍콩을 떠났다. 팔란지양행의 창립자는 마카오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지역 파시인 분묘에 묻혔다.

홍콩인들에게 익숙한 파시인은 루톤지(Jehanjir Rittomjee 律敦治)라는 사람으로, 아마도「루톤지 병원」때문일 것이다.

홍콩인들에게 익숙한 또 다른 한명의 파시인은 모디 나이트작(Sir Hormusjee Naorojee Mody)으로 그와 명성이 자자한 차타드 나이트작(Sir Catchick Paul Chater)은 공동 출자 경영자였으며, 당시의 홍콩총독 루가드(Sir Frederick RUGARD)와도 알고지낸 사이였다. 침사초이의 모디도「 麽地道」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는 홍콩대학의 주요 후원자중 한 명이었으며, 홍콩에서 몇 안 되는 대(大)자선가였다.

파시인 Dorabjee Naorojee는 홍콩 주점업의 선구자로 홍콩과 구룡에 많은 주점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도해소륜(渡海小輪公司)의 창립자이며 이 회사는 후에 발전하여 지금의 스타페리(天星小輪)가 됐다. 사실 파시인과 유태인은 천생이 상술에 뛰어나 단기간에 부상 했는데, 이들은 자선사업에 힘을 기울여 홍콩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중국 상인의 세력이 커지면서 파시상인은 비로소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였다.

파시인은 조로아스터교를 믿는데, 현재 홍콩의 조로아스터교인은 약 200여명이 채 되지 않는다. 코스웨이베이의 Zoroastrian Building(善樂施大廈)은 그들의 회의장소이며 그 안에는 사당과 꺼지지 않는 성화(聖火)가 있다.

 인도와 파시인은 본래 대장(大葬)을 하는데, 그 방식이 신장인(西藏人)과 사뭇 비슷하다. 그러나 그들은 화남지방에 거주하면서 그곳 풍습을 따라 매장을 하였다. 그러면서 해피벨리(跑馬地)에 자신들의 전용 묘지를 만들고 그 이름을 조로아스터교무덤(袄敎墳場)이라고 하였다.

1856년 건설된 조로아스터교 무덤의 모습은 단정하고 밝았으며 그 규모가 대단하였다. 보통 무덤과 다르게 파시인의 무덤에는 3가지 특징이 있는데「우물」, 「화묘(火廟)」그리고 화강암으로 된 비석「관」묘지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은 모두 그들의 신앙과 관련이 있는데,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들은 사람이 죽은 후 시체를 땅에 묻으면 땅이 불결해진다고 여겼기 때문에 일부러 두꺼운 화강암 판으로 묘비와 관, 묘지를 만들어서 시체와 토지사이에 간격을 두었다. 게다가 사람이 죽은 후 먼저 몸을 깨끗이 하기위해 「우물」을 만들었고, 그런 후에 배화의식(拜火儀式)을 하기위해 「화묘(火廟)」를 만들었다. 광주의 황포(黃埔)와 마카오에도 역시 파시인의 공동묘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파시인이 광주, 홍콩, 마카오 일대에서 활발히 활동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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