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불면증에 시달리던 Y가 활짝 핀 얼굴로 나타났다. 무슨 좋은 일이 생겼냐고 묻자 휴가로 고향인 캐나다에 가서 부모가 35년 넘게 경영하는 음식점 일을 돕고 왔단다. 더 얘기를 들어보니 그가 자란 환경은 5살부터 아버지의 펍 (Pub)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것으로 시작해 요리를 배운 제이미 올리버와 너무도 비슷했다.
어느 연말에 그의 집에서 열린 모임이 떠올랐다. 손님 중 누가 차려진 음식을 맛보더니 요리사까지 불렀느냐고 감탄하자 Y의 와이프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이가 만든 거예요. 지금 주방에서 디저트를 만들고 있으니 직접 가서 보세요." 미심쩍어하는 몇 명이 우르르 주방으로 몰려갔고 범상치 않은 칼솜씨로 복숭아를 손질해 꽃모양을 만드는 그를 목격할 수 있었다.
모임이 끝날 무렵, 타고난 재주를 본격적으로 써먹을 생각은 없는지 그에게 물어보니 한숨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이야 매일 들지만 애들 가르치고 생계를 짊어진 가장이 꿈을 들먹인다는 건 거의 사치에 가깝다고 봐요. 그러니 이대로 계속 갈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때로는 삶이 내가 원하는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상황을 만들어줄 때도 있는 법. 온종일 원치 않는 일을 하며 의무감에 치여 불면의 밤을 보내느라 다크서클을 달고 살던 그는, 회사가 다른 회사와 합병하는 과정에서 부서가 공중분해 되는 바람에 실업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다. 그대로 계속 가겠다던 계획을 수정해 인생 2막을 궁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고심하던 그는 주방용품점을 오픈하고 사장이 되었다. 취급 제품으로 매장에서 직접 쿠킹 시범을 보이며 요리솜씨를 발휘했고 가족들은 아빠의 웃는 낯을 무척 자주 보게 되었다. 요식업의 베테랑들인 일가친척의 조언이 새내기 사업가인 그에게 힘을 주었다. 고되지만 좋아하는 일에 온힘을 쏟아 붓고 후회 없이 단잠을 즐긴 덕인지 Y의 얼굴은 먹구름이 지나간 하늘처럼 말끔해졌다.
실리콘 주방용품에 꽂혀 매장을 찾아갔을 때 그가 한 말이 기억난다. "단 하루도 좋은 기억이 없는 회사에 13년이란 세월을 바친데다 결국엔 밀려나는 수모까지 당했으니 더 일찍 용기를 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과연 그럴까. Y가 진작에 용기를 냈더라면 직장을 잃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까. 가장 극단으로 자신을 내몰아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자극이 없어도 제때 정신을 차려서 인생의 유턴을 감행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둔갑하기 전에 미리 고려해볼 사항은 무엇일까.
상상하고 플레이하자, 최악의 시나리오!- 현 직장에서 쫓겨났다면 재취업했을 때 무엇을 개선할 것인가. 그 일을 지금 실행하라.
-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돌아와 빈집에 들어설 때 무엇을 뉘우치고 유감스럽게 여길 것인가. 그 일을 당장 바로잡아라.
- 집단 왕따를 당하는데 혼자서 이겨내야 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 일을 과감히 저질러버려라.
-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가장 먼저 무엇을 후회하고 가슴 아파할 것인가. 그 일을 속히 해결하라.
- 자는 사이 90킬로 뚱보가 돼버렸다면 어떻게 살을 빼고 건강을 돌볼 계획인가. 그 일에 오늘 착수하라.
- 외출한 사이 집에 불이 나서 잿더미만 남았다. 무엇에 의지해 소생의 힘을 얻을 것인가. 그것을 지금부터 소중하게 여겨라.
비록 위에 나온 사항들이 긍정에 찬 리스트는 아니지만 이런 상상들이 변화의 동기가 될 수 있다면 나름의 쓸모를 다한 것이다. 어차피 비슷한 일들로 걱정하고 불안에 떠느니 이런 식으로라도 솔루션을 상상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내친김에 이번 여름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플레이 메이트로 데리고 놀아보자. 다크서클을 트레이드 마크로 달고 다니던 Y가 불면증을 떨치고 단잠을 자듯, 나를 백 퍼센트 비워내고 잠드는 나날들을 위하여.
<글 베로니카 리(veronica@coaching-zo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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