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國父)가 빅토리아감옥에 수감되었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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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살, 33살때의 사진, 1915년 10월15일 결혼 사진(왼쪽 부터) |
쑨원이 홍콩을 떠난 1895년부터 신해혁명이 성공한 1911년까지 16년간 쑨원의 동료 미야자키 도라조(宮崎寅藏)등 일본인들은 홍콩에 와서 혁명당원들에게 연락을 하거나, 혹은 혁명당원들은 홍콩 부근 해역에 체류하며 배위에서 혁명 활동 계획과 각자의 임무분배를 비밀리에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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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장 |
'1900년 의화단(義和團)사건이 발발하자, 하계(何啓)가 홍콩총독 블레이크(Sir Henry Arthur BLAKE)에게 상서를 올려 쑨원과 이홍장(李鴻章)이 홍콩회견을 계획하며「광동·광서 독립 兩廣獨立」을 모색하고 있을 당시 쑨원은 바다에 머물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홍콩에 갈 수 없었다.'
쑨원은 오직 1901년 12월 초에 홍콩에 와 머물렀다. 당시 쑨원은 일본정기선을 타고 홍콩에 도착해 7일 동안《중국일보》신문사에 머물렀다. 쑨원이 홍콩에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그의 제1차《추방령》이 만기가 되어서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홍콩정부는 1902년과 1907년에 금령(禁令)을 거듭 공포하였다. 그러자 쑨원은 배를 이용해서 홍콩을 경유하던 중 배가 정박해있는 기회를 틈타 당원들과 만남으로써 홍콩정부의 금령위반을 피하는 한편 개인의 안전을 지켰다.
쑨원의 일생에서 두 번째로 수감되었던 것은 1904년 4월 미국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당시, 미국이민국에 의해 22일 동안 구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홍콩 빅토리아감옥은 아니다.
신해혁명이 성공하면서 쑨원은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다가 1912년 사임하였다. 그가 홍콩을 경유할 때, 비록 《추방령》은 아직 만기가 되지 않았었지만 여전히 귀빈이상의 대우로 홍콩정부의 환영을 받았다. 쑨원이 마지막으로 홍콩을 방문한 것은 1923년 광주로 돌아가던 중 홍콩총독 스텁스(Sir Reginald Edward STUBBS)의 점심초대를 받고 홍콩대학에서 연설을 했을 때이다. 신해혁명이후 쑨원의 신분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콩정부가 존중을 한데다가 더욱이 그를 체포하여 빅토리아 감옥에 구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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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년 광저우에 군사학교를 세울 당시의 쑨원 |
한 걸음 더 나아가 분석해 보자면, 홍콩은 영국법을 따라 쑨원에게《추방령》을 내렸다. 영국은 청나라와 불편해 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북경정부를 고려해 쑨원의 홍콩방문을 일부러 환영하지는 않았다. 홍콩은 비교적 쑨원을 동정하였고, 우호적인 관계를 고려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쑨원은 홍콩의 《추방령》을 존중 하였고, 이는 쑨원 기념관에 있는 1909년 8월 13일 쑨원이 영국정부에 신청한 홍콩입국에 관한 친필서신에 명시되어있다. 또한 당시 홍콩정부가 쑨원의 입국과 방문을 거절하였을 때, 쑨원은 명령을 그대로 따라 구금되지 않았다. 만일 국부(國父) 쑨원이 빅토리아 감옥에 수감되지 않았었다면, 또 다른 국부(國父)는 누구였을까?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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