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사당(文武廟)
중국인의 재판기관
모든 사람들이 아는 문무사당은 문창제文昌帝(문제文帝)와 관제關帝(무제武帝)를 모시는 사당이다. 더욱이 홍콩의 문무사당은 홍콩개항초기 중국인 재판기관으로 홍콩의 수많은 사당 중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문무사당은 일찍이 중국인과 동업조합사람들이 모여 공무를 논의하는 장소로 그 지역의 경제와 상업발전, 기타 대사(大事)에 관련한 일을 이곳에서 중재하고 상의하였다. 이렇듯 문무사당은 홍콩중국인의 정치, 경제, 사법, 교육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문무사당과 중국인사회의 발전홍콩개항초기 내륙에서 온 새로운 이민자들은 중환과 상환에 상시장(上市場 upper bazzar 현 太平山街(Tai Ping Shan Street) 일대), 중시장(中市場 중환시가지 맞은편의 각린가(閣麟街)와 결지가(結志街) 부근), 하시장(下市場 蘇杭街(Jervois Street)일대, 당시에는 해변과 인접해 있었다) 등 3개의 시장을 형성하였다.
1841년 6월 홍콩 최초로 토지경매가 시행되었을 때 시장 구역은 많은 중국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리고 1844년, 홍콩이 식민지로 정식 선포되면서 이듬해 홍콩은 중환과 상환에 가지고 있던 계획을 진행시켰다. 중시장 인근의 주민거주지역이 매우 복잡한데다가 도박장과 마약상이 가득했으며 또한 서양인주거지역과 인접해있어 그곳에 사는 중국인들을 강제로 태평산일대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상시장 인구는 더욱 많아졌고, 이곳은 홍콩에서 중국인이 가장 밀집한 지역이 되었다.
중국 내륙 도시의 풍습에 따르면 성황(城隍)은 도시의 수호신으로 많은 오래된 도시에 성황당(城隍廟)이 있다. 홍콩개항초기 지금의 Hollywood Road에 있는 경찰숙소 내에 성황당이 하나 있었지만 얼마못가 철거 되었고, 오늘날 성황가(城隍街)라는 명칭만 남아있다. 성황당은 문무사당과 같은 기능을 하였다. 문무사당이 언제 건축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초창기에 초라한 감실(龕室) 하나만이 있었다. 1847년 문무사당은 로아귀(盧亞貴 도박장과 마약상을 운영하여 부자가 된 건달)와 담재(譚才 가옥건축 청부사)의 기부로 증축되었고, 1851년 각각의 동향단체, 방언단체 상점 주인들이 돈을 모아 다시 증축하여 지금과 같은 외관이 되었다. 단기간에 걸친 2번의 증축공사는 문무사당에 참배자가 많고, 신도 역시 매우 많음을 반영하였다. 또한 중국인의 자본과 응집력이 날로 강력해짐을 뚜렷이 나타내었다.
문무사당은 중국인 사회구역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문무이제(文武二帝)는 과거제와 상업을 주관하여 모든 중국인이 중요시하였다. 또한 오래전부터 본지 주민의 깊은 지지를 받아 점차 홍콩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당으로 발전하였다.
선서장소일찍이 홍콩의 법이 완전하지 못했을 때, 중국인 상업지역에 위치한 문무사당은 중국인 사회지역의 중심이었으며, 사당과 관련된 「사무소」는 중국인의 계약서명, 재판, 상업분쟁 등을 해결하는 장소였고 전통 민족과 권력가 조직을 대신하였다. 계약의 정상적인 절차는 먼저 상인이 사무소에 가서 관리에게 증거를 보이고 거래조건을 결정한 다음 가까운 곳의 문무사당의 관제 앞에서도 노란 종이를 태우고 가시연을 끊는다. 그러면 계약은 정식으로 성사되고 그 효력이 발생한다. 문무사당에서 모시는 무제 즉, 관공(關公)은 신용과 의리를 나타내며, 이것은 중국인이 장사를 하는데 있어 모범이 되는 것으로 모든 상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사무소 밖에는 「公爾忘私入斯門貴無偏袒, 所欲與聚到此地切莫糊塗 공의를 생각해 사적인 것은 버리고 한쪽을 편드는 일이 없어야 하며, 욕심을 부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마라.」라는 한 폭의 대련(對聯)이 있는데, 이는 문무사당이 물건을 매매 할 때 공평의 원칙을 중시했다는 것을 잘 나타낸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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