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사당(百姓廟)나그네의 혼이 쉬어가는 곳상환의 태평산가(太平山街 Tai Ping Shan Street)와 방항(磅巷 Pound Lane)이 만나는 곳에 있는 광복공동사당(廣福義祠), 즉「백성사당」은 1856년에 세워졌다. 2층으로 된 사당의 지장보살을 모시는 정전 문 위의 돌에는「광복자항 廣福慈航」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작은 사당은 동화삼원(東華三院)이 설립되면서 촉성되어 홍콩의료 발전에 기여하였다.
태평산지역의 발전홍콩 초기 상환의 중국인 상업지역이 형성되는 데에는 식민지정부의 도움이 있었다. 1841년 영국인이 홍콩에 들어온 후, 「정부산-Government Hill」의 센트럴과 깜종(Admiralty) 일대에 토목, 건설 등 각종 시설이 크게 번창하면서 방대한 양의 노동력과 각종 서비스가 필요하게 되자 내륙의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홍콩으로 왔다. 그러자 영국정부는 센트럴일대를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허가하였고, 초임 홍콩총독 Sir Henry Pottinger는 중국인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시장을 형성해 매매를 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홍콩 초기의 상시장(上市集 Upper Bazaar)이다. 그 후, 식민지 정부는 1843년 센트럴 일대의 토지를 유럽 사람들에게 매각하였고, 그곳에 살고 있던 중국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통과시켜 태평산 지역에 중국인 구역을 건설하였다. 태평산 지역은 빠른 속도로 중국인 집단거주지역과 상업지역으로 발전하였고, 인구가 밀집했으며 상점들이 숲을 이루었다.
백성사당의 유래중국 상업대표와 상인 14명은 1851년 홍콩을 유랑하다 혹은 불행히도 타향에서 죽은 중국인을 위해 위패를 모시고, 그들이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넋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가족친지와 친구들이 홍콩에서 안전히 머물다 훗날 그 위패를 직접 고향으로 가지고 돌아가 안치시킬 수 있도록 홍콩정부에 공동사당을 세우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홍콩 총독은 땅을 마련하는 것에 허가를 내주었고, 1853년 사당이 세워졌다. 이것이「광복공동사당」의 유래이다. 광복공동사당은 전국 각지의 성(姓)이 다른 사람들이 잠시나마 그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었으며, 옛사람들은 이곳을「백성사당」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조중앙정부의 정국이 변화되면서 많은 중국인이 화를 피하고 살길을 찾아 남하 하면서 사당의 역할은 점점 위패를 모시는 데에 그치지 않게 되었다. 당시 홍콩정부에는 의료시설이 부족하였고, 중국인 의원의 공동 영안실도 없었다. 백성사당은 진료소를 설치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약을 나누어 주었는데, 사람이 너무 많은 탓에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어떤 환자들은 죽은 후에 시체를 처리할 사람이 없어 사당의 구석에 방치되었고, 사당 안에는 위독하여 사경을 헤매다 죽는 환자들로 가득하였다. 일부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사당을 집으로 삼기도 했다.
사당에는 기본적인 위생조건과 관리가 부족하였으며, 사당 안은 악취로 뒤덮여있었다. 도처에서 더럽고 불결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열악한 환경은 실로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사회 인사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1869년 4월 홍콩에서 국경을 넘어 이민을 가려던 한 남자가 광복사당에서 죽게 되자, 사당에 사회적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중앙서원교장 Freserick Stewart와 중국인 정무사 대리인 Alfred Lister는 함께 사당을 시찰하고 온 후, 상황이 매우 참혹하다고 하였으며, Alfred Lister는 식민지부대사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제가 처음 사당을 시찰하였을 때, 생사를 넘나드는 9~10명의 환자가 『병원』에 누워있었습니다. 그 중 아마도 설사를 하여 몹시 야위어 사경을 헤매던 한 환자는 그의 신체만한 나무판자 위에 누워있었는데, 그곳은 매우 좁아서 서있을 수조차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또 다른 방에 안치되어있던 곧 숨이 끊어질듯 한 두 명의 환자 옆에는 시체 한구가 있었고, 땅바닥은 소변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 옆방에는 관리인이던 사람들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중 한 사람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 밖의 다른 방에도 비참하게 말라 뼈만 앙상한 환자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움직이지도 말을 할 수도 없었으며, 옷이 남루한 것으로 보아 이곳으로 후송되어 온 후로는 옷을 갈아입은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곳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레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상황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같은 해 4월 20일 사당을 취재하러왔던 서양신문사 기자는 이튿날 백성사당을「인간지옥」이라고 보도하였고, 이 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한편 홍콩 거주 외국인들 사이를 시끄럽게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홍콩총독 Sir Richard Graves Macdonnell은 백성사당의 환경을 개선하기위해 환자를 정부병원으로 이송하고, 사당의 관리권을 두 명의 의원에게 위임하여 책임지고 사건을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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