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름이 뭐야? 이름이나 좀 알자" 씩씩거리며 달려온 미국여성이 삐딱하니 서서 그녀를 위아래 쭉 훑어보며 툭 던진 말이다.
"일을 하고 싶기나 한거니? 일 하기 싫음 집에서 잠이나 자지 여긴 뭐하러 온거니?" 히피족 차림의 불란서 여성이 비아냥거린다.
군위관 처럼 생긴 독일 여성나서서 한참을 무어라 떠드는데, 같은 영어인데도 참 알아듣기 힘들게 말을한다.
러시아 안내원은 팔짱을 낀 채 묵묵하게 듣고만 있다. 집단으로 그녀를 둘러싸고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함에도 불구하고 안내원은 낯빛 하나,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긴장감이 맴돈다. 그리고 그녀가 싸늘하게 입을 연다.
"얘기 다 한거지? 끝난거면 투어나 하자. 내 이름이 그렇게 궁금해? 가면서 말하지. 따라들 와!!"
전세를 가다듬고 2차공격을 시도하려든 그녀들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할 말을 잃은 그녀들은 안내원이 겨울궁전을 돌며 미술 작품, 역사적인 유물 등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허점을 찾아 허를 찌를 궁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러시아 안내원의 똑 부러지는 설명과 오만하고 앙칼진 표정, 거침없는 말투에 서서히 매료가 됐는지, 점점 순한 양이 되어간다. 간혹 나서기 좋아하고 질문하기 좋아하는 그녀들이 말의 허리를 뚝 자르고 질문을 하면 이렇게 말한다.
"질문은 나중에! 지금 설명중이야. 설명 들으면 다 알게 되거든!!"
"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박물관에서 나와 푸쉬킨 레스토랑으로 가기 위해 19세기 중엽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넵스키 대로를 걷는다. 백야, 안나 까레리나, 러브 오브 시베리아, 닥터 지바고와 같은 예술적이고 낭만적인 영화들의 훌륭한 배경이 되었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넵스키 거리를 걸으며 죄와 벌의 작품구상을 하거나 차이코프스키가 호두까기 인형의 악상을 떠 올리려 걸었을 그 거리를 내가 걷는다.
어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거리를 하루종일 걸으며 푸시킨의 레스토랑을 찾아낸 제니퍼가 바로 '이곳'이라며 간판을 가리킨다. 알아볼 수 없는 러시아 말로 레스토랑 이름이 있건만, 우리로서는 발음할 길이 없어 편한대로 푸시킨 레스토 랑으로 부른다.
레스토랑 입구에는 그의 형상을 한 마네킹이 있다. 사진에서나 봤던 푸쉬킨이 비록 모형이긴 하지만 레스토랑에 떡하니 앉아 있는 모습에서 친근감이 물씬 느껴진다.
이렇게 앉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창밖을 보며 '대위의 딸'을 구상하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시를 썼겠지.
그리고 그를 비극으로 몰고간 사랑하는 여인 나탈리야를 지키기 위해 결투장으로 묵묵히 걸어갔으리라... 끝내 그는 이 넵스키 대로의 푸시킨 레스토랑으로 돌아오지 못했지...
중후하고 아늑한 푸쉬킨 레스토랑,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 고혹스러운 와인의 빛과 향, 잔잔하게 드는 햇살, 맛난 음식들... 이렇게 먼먼 이국땅에서 푸쉬킨에 취하고 행복감에 빠져있는 우리에게 러시아 종업원들은 악명 높은 불친절은 한 바가지 담아 휙하니 뿌리고 간다. 순간 푸쉬킨의 시가 머리속을 훑고 지나간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나니..."
푸시킨의 시가 여기 이 러시아에서 이렇게 위안이 되다니....
아, 마트로시카!! 홍콩에 있는 지인들의 선물을 사기 위해 러시아의 상징적인 기념물 마트로시카 가게로 들어선다.
어머니를 의미하는 라틴어의 '마테르(mater)'에서 기원한 이 여성 인형은 원래 시베리아에서 여신을 금상으로 만들어 그 속에 똑같은 여신들을 차곡차곡 집어넣던 민간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작은 인형은 보통 대여섯 개, 큰 것은 15개까지도 들어간다. 가장 큰 바깥 인형은 어머니를 상징하고, 그 속의 인형들은 계승될 다음 세대들로서 모계적 다산성을 의미한다. 러시아에서 어머니는 대지이고, 대지는 곧 어머니이다.
제니퍼와 나는 아름다운 디자인과 색상에 취해 인형을 한 보따리 주어 담는다. 그러자 불친절하기로 소문난 러시아 종업원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어 "마담, 유어 쏘 카인드"라며 아부를 퍼부어댄다. 뭐가 카인드 하단 말이지? 우리 가져갈 기념품 사는데 왜 카인드야? 하면서 신용 카드를 꺼내 러시아 루불로 쓱 계산을 하고, 호텔로 신아나서 돌아온다.
잠자리에 들기 전, 영수증을 정리하던 제니퍼가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인형이 가득 든 묵직한 봉지를 든 그녀의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다.
"언니야! 큰일 났데이, 이 인형 이게 다 얼만줄 아나?"
"글쎄, 뭐 비싸봤자 2천불(홍콩달러) 쯤 하겠지"
"아니다 언냐, 이거, 3만불이 넘는다. 4백만원이라구!!"
"으악~~~~~~"
/ 계속....
* 대한항공은 인천과 모스크바를 주3회 직항으로 운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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