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햇살 가득한 금요일 오후, 30대 회사원 S는 시내 한복판에 걸린 레이디 가가의 빌보드를 보자마자 가던 걸음을 멈추고 탄성을 질렀다. "어머 립스틱 색깔 너무 멋지다! 이런 봄날에 어울리는 핑크색이죠? 아, 나도 저런 핑크색을 바르던 때가 있었는데…." 아쉬운 투로 레이디 가가의 핑크빛 입술을 한참이나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내친김에 하나 사서 써볼까?' 궁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뭇잎 뒹구는 것만 봐도 깔깔대는 10대 소녀는 핑크색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맘껏 핑크를 즐긴다. 팬시용품, 머리핀, 옷가지와 노트마다 핑크가 빠지는 때가 드물게 푹 빠져서 지낸다. 그녀의 핑크 사랑은 무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20대는 계절과 무드를 막론하고 핑크를 활용한다. 핑크로 자기 매력을 좀더 돋보이게 하든가 단점을 커버하게 만든다. 칙칙한 장마철에는 핑크색 우산을 쓰고 스산한 겨울날 포근한 체리핑크 머플러를 두르고 도시를 누빈다. 핑크 빅벨트나 리본장식 핑크 슈즈도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슴없이 소화해내는 동시에 그 자체를 20대의 특권인양 맘껏 탐닉하는 것이다.
그러다 정장이 대세인 30대에 들어서면 얘기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헤어스타일은 물론 옷장, 신발장, 가방 속 아이템들까지 직장인다운 모습으로 삭제 편집되기 때문이다. 자기 매력을 살리기보다 무난한 취향에 묻어서 가려하고 개성을 표현하기보다 당당하고 기가 세게(?) 보이는 편을 택한다. "내츄럴" 이미지의 이름으로 핑크색이 들어간 아이템들이 여자의 방에서 대거 퇴출당하는 때가 바로 여자의 30대다. 자기만의 개성은 20대 시절 잠시 반짝했다 희미해진 옛 추억이 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4, 50대에 접어들면 중년여성 특유의 유니폼 체제에 본격 돌입하게 된다. 예의상 굽은 있으되 걷기 편한 단화, 스판이 들어가 구김이 없는데다 물세탁이 가능한 바지와 외투들, 평상복도 되고 외출시 속에 받쳐 입어도 되고 낮잠 잘 때 입어도 되는 다용도 셔츠, 어떤 옷을 입어도 매치가 되고 너무 튀지 않으면서 손질이 쉽고 나이 값을 할 수 있는 점잖은 헤어스타일. "어머니 패션"은 그렇게 탄생·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60대를 지난 노년이 되면 정반대의 사태가 벌어진다. 주위에서 화려한 원색을 입으라는 권유가 쏟아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입으시겠어요? 마음껏 밝고 화사한 걸로 골라보세요!" 알록달록한 스카프, 반짝이가 박힌 신발, 손녀들 드는 디자인과 비슷한 가방, 컬러풀한 바지, 공주풍 쟈켓과 리본장식 모자를 거친 그녀는 마침내, 핑크 립스틱을 바르고 외출을 하게 된다! 먼길을 돌고 돌아 생기발랄했던 여자의 설렘과 기대가 서린 핑크를 다시 만나 회포를 풀게 되는 것이다.
핑크에 대한 아쉬움은 여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갓 입사한 신입사원의 날렵한 복장을 보며 50대 중년신사 A도 속삭이듯 낮은 음성으로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딱 10년만 더 젊다면 저런 셔츠와 넥타이를 해보고 싶군요…."
새봄이 좋은 건 자연 속 만물이 피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람이 향기롭고 볕이 좋은 봄날 올려다본 하늘 속에서 한때나마 활짝 피어올랐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아련한 재회는 그날과 오늘 사이에 멀어진 거리를 실감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슴 한 켠에 담고 살아온 싯구를 떠올리게 된다.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혹은 그리움 속에 유치환의 <행복>을 즉석 모방하기도 한다. '그리운 지난날 내 모습이여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한때 싱싱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레이디 가가의 핑크빛 입술을 덩달아 쳐다본 탓일까. 이후 핑크색 아이템을 이것저것 사들이고 서랍에 방치해둔 핑크 립스틱까지 꺼내 바르고 말았다. 팔팔한 청춘도 희망을 버리면 투신을 하고, 백세 노인도 영혼이 젊다면 해맑게 웃을 수 있다. 나이와 무관하게 늘 새롭게 피어난다는 건 온전히 마음에 달린 문제다. 꽃은 한번 피면 저버리지만, 우리 마음에 달린 꽃잎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한 찬란한 생기를 간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글·베로니카 리(veronica@coaching-zo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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