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축제 강릉 단오제친구 남편 경철씨가 정동진에서 가장 멋진 리조트호텔인 '썬 크루즈 리조트' 특실에 방을 잡아 놨다. 창문을 열고 발코니에 나가니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정동진의 깊은 옥색을 띤 푸른빛 바다가 눈앞에서 일렁인다. 멀리 정동진의 하늘과 바다가 깊은 사랑을 하듯 하나로 맞닿는다.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다.
짐을 내려놓고 다시 산횟집으로 내려가 민주 부부와 함께 단오제가 열리는 강릉 오십천으로 향한다.
전통과 역사가 오래된 어울림의 축제. 옛 풍습 그대로 천년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강릉단오제가 한창이다. 단오제와 맞추어 강릉 오십천 강변 양쪽으로 끝없이 들어선 단오장은 장사꾼과 구경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강물처럼 흐르는 오십천을 바라보며 민주와 나, 민주 남편 셋은 고달픈 우리네 삶을 안주삼고 동무삼아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등 각 지방의 막걸리를 섭렵하며 마시고 붓기를 밤이 이슥해 지도록 한다.
새벽녘에 호텔로 들어와 먼동이 틀 시간에 자명종을 맞춘다. 잠을 잔다. 죽은 듯이 깊은 잠을 자고 또 자다 자명종 소리에 깨어 발코니로 나가 하늘을 보니 온통 회색장막이다. 정동진의 그 찬란한 해돋이와 나는 영 인연이 아닌가보다.
퉁퉁 부운 얼굴과 매우 불쾌한 속을 간신히 다스리며 산횟집으로 내려가 오징어 물회로 속풀이를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시뻘건 물회가 부담스러웠지만 살캉대는 오징어와 얼큰하고 삼삼한 국물은 내 불편한 속을 단박에 씻어낸다.
정동진역 부역장어제 밤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면서도 직업의식이 발동해 정동진 역장 인터뷰를 주선해 달라고 했더니 역장은 교육을 듣느라 부재중이고 부역장만 근무 중이라고 하여 결국 부역장을 만나기로 했다.
부역장쯤 됐으면 얼굴에서 인생역경이 그대로 느껴지는 나이 지긋한 분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내 앞에 나타난 부역장은 젊고 잘 생긴 말쑥한 총각이다. 다짜고짜 나이부터 묻고 결혼여부를 물으니 꽤나 수줍어한다. 내 머릿속에서 싱글녀들이 와르르 스쳐간다. '누굴 하나 엮어줄까?’
이동진 부역장님, 강원도에서 태어나 줄곧 강원도를 지키고 있다는 그분. 정동진역에서 근무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를 소개해 달라고 하니 시선이 먼 곳에 잠시 머문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정동진의 해돋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수많은 사연을 안고 몰려오곤 한다. 그런데 아주 간혹, 삶의 무게에 짓눌려 인생을 마무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정동진을 찾는 이들도 있단다. 힘겨웠던 삶의 마지막 종착역을 정동진으로 삼고, 떠오르는 태양을 꼭 한 번만 보고 떠나겠노라던 이들, 정동진의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시뻘겋게 솟아나는 태양을 만난 후 그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며 역무원을 찾는단다. 그저 감사하단다. 이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정동진이 있고, 이렇게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정동진역이 있어 감사하다고 몇 번이고 인사를 하며 이른 새벽 첫 기차에 몸을 싣는단다.
추억을 묻고부역장님과 인터뷰가 끝난 후 정동진을 누빈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돌 하나 담벼락 하나, 길옆 들풀 한포기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훑어간다. 정동진 바다의 파도소리와 여행객들의 까르르대는 웃음소리, 우리집에 묵고 가라고 외치는 민박집 아주머니의 구수한 사투리가 마냥 정겹다.
홍콩을 떠나온 지 1주일이 넘게 계속 호텔에서만 지내고 밥을 사먹다 보니 문득 집이 그리워지고 집 밥이 그리워진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자.
터미널로 가서 표를 물리고, 내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고 두어 시간을 갔을까, 버스가 휴게소에 잠시 정차한다. 밖으로 나가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안흥찐빵' 한 접시를 사온다. 데일 듯 따뜻한 찐빵을 손에 들고 호호불며 한입 가득 베어 무니 몇 시간 전 그 불안감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내 인생에 다시 행복감이 물씬 몰려온다.
아, 하잘 것 없는 빵 하나에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는 게 결국 우리네 인생인가 보다. 끝.
* 정동진 가는 법청량리, 동대구, 부산 등에서
- 열차 : 6~8시간 소요 - 버스 : 3~5시간 소요
* 정동진 산횟집: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297-3
전화 : 033-644-2740
<로사 권(rosa@weeklyh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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