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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영 회장의 생활칼럼 시즌2] 2탄- 시골 촌놈 상경기
  • 위클리홍콩
  • 등록 2022-02-22 15:03:52
  • 수정 2022-04-10 16: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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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곳에서 서울로 올라가 봐야겠다는 구체적인 꿈을 꾸었던 시절은 중학교 졸업 무렵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산골에서 정성스런 불공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할머니와 어머니는 가끔씩 어린아이였던 나를 데리고 감악산 800미터 고지에 있는 연수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셨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서 멀고 험한 길을 장난질 치며 즐겁게 따라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새벽에 약 두 시간 걸려서 정상을 오르면서 펼쳐지는 저 멀리 보이는 산들 너머에 서울이 있고, 우리 아들은 이다음에 커서 서울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어머니께서 강조하셨다. 그래서 난 그때부터 서울을 무작정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옛날에 사범학교를 졸업하셔서 일찌기 서울에서 직장을 잡고 계셨던 작은 아버지가 더욱 적극적으로 장조카를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어른들에게 이야기하시던 중이었다. 고등학교를 서울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우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졸라서 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나의 서울행은 그 당시 할머니의 완강하신 반대로 운명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손자의 서울행을 점쟁이에게 물어본 결과 대학생이 될 때까지는 절대로 북쪽으로 보내면 안 된다는 점괘가 나왔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타향에 보내기 싫은 마음에서 거짓말(?)을 지어내셨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할머니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가풍(家風)상 할 수 없이 거창에서 가장 좋은 거창고에 진학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거창고마저 진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내가 진학해야 할 거창고의 전영창 교장 선생님이 3선개헌 반대운동을 이유로 잠시 해임되셨고, 그해에 신입생모집도 중지되었으며 모든 거창중학교 졸업생이 할 수 없이 신설 학교인 거창대성고로 진학해야 했다. 그런데 전화위복으로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모교가 거창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고가 되었다.

 

중앙대 캠퍼스에서 중, 고등학교 동창생 친구들과 함께 (오른쪽 김동학 대표약사, 중간 김운영 회장, 왼쪽 정용상 교수)1972년 말에 대학 예비고사 시험을 치른 후 거창 대성고 김한영 교감 선생님의 특별 허락을 받고서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서울행이 이루어졌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라는 옛말을 따라서 무작정 서울의 대학에 진학해 보겠다는 평소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부푼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졸업도 하지 않고 학교 수업을 빼먹고 대학 본고사 준비를 위해 서울로 가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평소에 방과후 학교에 남아서 밤늦게까지 자율학습을 하고 있을 때면 조용히 학교에 오셨다가 나의 학습 태도를 관찰하셨던 교감 선생님이 같이 자율학습을 하였던 본인과 짝꿍(정용상 교수)에게 특별히 서울에 가서 입시 준비를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셨던 것이다.


홍제동 문화촌 아파트 위에 있는 달동네 (사진 출처: 서대문구구청 블로그)

꼬깃꼬깃 현금을 준비해서 허리에 채워주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떠나 꿈에 그리던 서울역에 도착한 순간, 휘황찬란한 불빛의 서울이 마치 천국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그날부터 생활해야 하는 홍제동 문화촌 산동네로 버스에 짐짝같이 실려서 가는 순간에 서울의 지옥 같은 짐짝 버스 생활을 갑자기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머니와 같이 살아야 하는 동네가 서울에서 가장 촌 동네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착 다음 날부터 인왕산 8부 능선에 있는 문화촌 달동네 무허가 루핑 집의 단칸방에서 물지게를 지고 내려와서 49번 버스 종점의 부근에 있는 공공수도에서 물을 받아서 다시 오르막길을 헉헉거리며 약 30분 정도 걸려서 집에 도착하여 아침을 급히 먹고 책가방을 챙겨서 종로1가에 있는 대학입시학원에 나갈 때 힘든 촌놈의 서울 생활을 비로소 체험하였다. 짐짝 버스에 겨우 탑승하였으나 가끔 학원 앞에서 수많은 승객이 앞을 가로막아 미쳐 내릴 수 없어서 종로2가까지 가서야 겨우 내려서 학원까지 헐레벌떡 뛰어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있었다. 이런 서울 생활은 대학 생활을 서울에서 시작한 나에겐 커다란 도전이었으나 그 후 많은 여러 가지 어려운 인생 여정에서 회고해 보면 아주 조그마한 시작에  불과하였다.

 

대학교 졸업 기념 가족 사진(오른쪽 앞 김운영 회장, 오른쪽 뒤 아버지, 왼쪽 앞 어머니 왼쪽 뒤 누나)한편 아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려면 미리 서울에 올라와서 살 곳을 물색해야 한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막노동과 행상을 하며 친척들이 모여 살았던 홍제동(문화촌)에서 그들을 따라서 힘든 행상일을 배우고 계셨다. 이렇게 서울에 1년 먼저 올라오셔서 행상을 하시며 고생하셨던 어머니와의 상봉은 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일이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그 당시 중앙대학교 정경대학장이셨던 하경근 교수님(중앙대 총장역임)과 친분이 있으셨던 작은아버지의 강력한 추천으로 나는 중앙대 정경대학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고시 준비생을 지원하기 위하여 만든 정경연구반에서 장학금과 학비 지원 혜택을 받고 할아버지의 지원과 어머니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4년간의 대학 공부를 마쳤다.

 

나는 그 당시 고향마을에서 서울의 4년제 사립대학을 졸업한 몇 안 되는 한 사람이 되었다.

 

<다음 호 3탄 [삼성그룹 입사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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