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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영 회장의 생활칼럼 시즌3] 2탄- 홍콩 창업 이야기
  • 위클리홍콩
  • 등록 2022-04-15 09:56:27
  • 수정 2022-04-15 12: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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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홍콩에 주재하면서 홍콩 로컬 건설공사를 수주하기 위한 노력을 하며 홍콩 정부건설 관련기관을 부지런히 방문하고 다녔다. 당시에 홍콩에 진출하여 활발하게 건설공사를 하고 있었던 국내업체는 대한조선 공사(지사장:이면관)가 유일했다. 몇 년 뒤에 현대건설이 활발하게 공사를 하기 시작하였으나 당시에 홍콩 로컬 건설시장 진출은 여러 가지 제약조건으로 수익성이 별로 없는 시장이었기에 대부분의 경우는 주재원을 파견한 후 1~2년 내에 대부분 사무소를 폐쇄하고 조기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유원건설도 일반적인 업계의 풍문과 매스컴의 정보에 따라서 거대한 중국 시장 개방을 기대하고 지사를 어렵게 설립하였으나 홍콩에서조차 건설면허 획득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 2년 만에 철수를 결정하였다. 대부분의 한국건설업체는 중국의 거대한 건설시장이 양국의 국교 정상화란 정치적 이슈가 해결되지 않는 한 개방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또한 대만과의 국교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는 대륙과의 국교 정상화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장기적인 접근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곤혹스런 현지 상황에서 나는 건설 관련 일보다는 무역업무에 관심을 조금씩 가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대륙과 무역업을 하는 경우에는 중국이 홍콩에 만들어 놓은 화륜공사(華潤公司)를 통해서 비즈니스거래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홍콩에서는 그 당시 중국무역과 관련해서 많은 기회가 오기 시작하였던 시절이었다. 나도 해외생활을 시작한 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홍콩에서 근무하면서 사고방식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특히 건설공사와 같이 매크로한 큰 개념의 건설 수주보다는 한가지 물건이라도 팔면서 눈앞에서 이익이 발생하는 무역업에 관심이 더하게 되고 흥미가 있었다. 그동안 동남아 지역에 살면서 친분을 쌓았던 친구들이 이런저런 것들을 한국에서 수입하거나 이들 국가의 제품을 한국으로 수출하는 무역 가능성 여부를 빈번하게 물어왔다. 본사에서는 지사 폐쇄 후 한국으로의 귀국을 통보하였고 신혼 시절 달동네 단칸방 생활 등으로 어렵게 지냈던 아내도 한국에 돌아가서 고통스런 시집살이를 다시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선뜻 귀국을 환영하지 않는 눈치였다. 더군다나 중국대륙의 엄청난 시장이 조만간 곧 열릴 것이라 하니 한국에서 그동안 알고 지냈던 많은 업체에서 홍콩에 남아서 수출을 도와달라는 제안들을 구체적으로 타진해왔다.

 홍콩방문 중인 절친들과 함께~ (왼쪽 보람양을 안고 있는 정동환 사장, 중간 삼양밸브 이영수 부장, 오른쪽 필자)

나의 홍콩에서의 창업은 군대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절친으로서 1사단에서 소대장을 같이 하였던 이영수 중위의 장인 어르신인 삼양밸브 양재우 회장님과의 인연이 상당히 큰 역할을 하였다. 해외주재원 시절의 초창기부터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홍콩 등 나라마다 친히 찾아오셔서 당시에 해외에 전혀 판매를 못하고 있었던 삼양 밸브제품의 판매를 도와 달라고 강권하시며 관련 자료를 건네주시고 제품의 우수성을 항상 강조하셨다. 하지만 유원건설에서 오너회장이신 최효석 회장님에 대한 충성심과 회사에 대한 자부심으로, 회사 일을 하면서 삼양밸브의 업무를 도와줄 수 없다고 매번 거절하였다.


그런 나를 더욱 좋게 여기신 양회장님은 이다음에 혹시 유원을 사직하면 삼양밸브에 와서 같이 일해보자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런데, 서울로 귀국한다고 전화 인사를 드리자 며칠 후 홍콩을 방문하신 양회장님이 이제는 홍콩에서 독립하여 본격적으로 에이전트로 모든 제품 판매를 해보라고 설득하셨다. 홍콩에서 주재하며 삼양밸브를 동남아에 판매하고, 혹시 실패하여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면 삼양밸브에 와서 계속 도와달라는 부탁이셨다. 사실 당시에 '한국이냐? 아니면 홍콩에 주저앉느냐?'의 절체절명의 선택기로에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샐러리맨과 개인사업자의 선택에 대한 엄청난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서울로의 귀국을 포기하고 홍콩에 정착하기로 아내와 상의한 후, 마침내 고달픈 보따리 장사를 택하기로 결정하였다. 

 젊은 주인 Ali의 철물점(海聯五金)에서~(왼쪽 Ali, 오른쪽 필자)

당시 보일러용 감압·안전밸브 시장은 일본의 선진경쟁사들이 동남아를 선점하고 있었다. 한국의 제조사는 삼양이 유일하였지만 모든 아시아 시장은 일본 브랜드인 요시타케(Yoshitake) 혹은 벤(VENN) 이외의 한국규격(KIS)의 밸브는 판매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신축건물에 사전 스펙작업이 되어있지 않은 제품인 한국산 설비부품들을 건설회사가 직접 구매하여 사용할 수 없어서 에프터서비스 부품으로 각 나라마다 철물점에서 구입하여 사용하는 형태였다. 지사 생활을 그만두고 보따리 장사를 시작하면서 양회장님이 주셨던 한글판 카탈로그를 영문과 중문으로 밤새워 번역하여 홍콩의 철물점(五金店)이 집중적으로 모여있는 몽콕(旺角) 시장의 철물점을 하나씩 방문하였다. 며칠 동안 시장을 헤매면서 철물점에서의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대부분의 가게주인이 50대 후반이라 광둥어로만 상호소통이 가능하였기에 손짓발짓만 하고 번번이 허탕을 쳤지만, 'HoiLuen(海聯五金)'이라는 철물점은 주인의 자리에 젊은 청년 Ali가 앉아있었는데 영어를 유창하게 하였고 건네받았던 명함에 주인(사장)이라고 적혀있었다. 알고 보니 건너편 골목에서 큰 가게를 창업하여 많은 돈을 벌었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새로운 가게를 열어서 맡긴 것이었다.

 아들과 같이 3대째 철물점(海聯五金)을 경영하는 Ali와 함께 (왼쪽 필자, 중간 Ali, 오른쪽 Ali의 아들)

나와 Ali Ng(伍)과의 만남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대부분의 일본 제품을 수입하여 엄청나게 비싸게 팔던 가게에서 한국산 삼양밸브를 수입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팔게 되니 모든 몽콕 철물점에서 삼양밸브는 가격이 싸고 품질 좋은 명품이 되었다. 밸브에서 보따리 장사를 시작한 왕초보 개인사업자가 밸브의 연관제품인 벤드 제품과 호스 등 철물점에서 필요한 모든 한국산 제품으로 아이템을 늘려나갔다. 그리하여 선박수리 용품인 성광벤드와 태광벤드의 홍콩대리점도 맡게 되었다.또한 대만,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의 수도에 있는 대형 철물점과 대리점 계약을 맺고 한국산 철물제품을 값싸게 공급하면서 급격하게 매출과 이익을 늘리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주재원 시절에 알았던 동남아 국가에 있었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더욱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창업 초창기의 어려웠던 시절에 삼양밸브 이영수 부장에게 몇 달씩 무료 숙식을 제공하였던 아내는 나의 보따리 장사 시절에 만만한 '하숙집 아줌마'였고, 덕분에 나는 한국산 자동밸브를 동남아에 최초로 수출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나와 함께 동남아에 삼양밸브의 수출 성공을 처음부터 지켜보신 양재우 회장님은 이제 고인이 되시고 3세 경영인이 이어받아서 발전시키고 있다고 한다.

 

한없이 열정적으로 한국의 자동밸브 공업 발전에 기여하신 양재우 회장님께 다시 한번 깊은 존경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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