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초창기 정착 시대(1949-1959)
4. 1948년 런던 올림픽에 홍콩한인회가 보인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된 하계 올림픽이 감동과 아픔의 역사를 아우르며 1948년 런던올림픽은 30회를 맞이했다. 116년의 올림픽 역사 중 1948년 런던올림픽은 냉전의 대립 속에 불참을 주고받았던 서구권과 동구권이 12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1988년 서울올림픽과 함께 ‘세계사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올림픽’으로 손꼽힌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1940년과 1944년 올림픽을 치르지 못했던 세계가 12년 만에 처음으로 만난 1948년 런던올림픽은 우리에게도 소중한 의미로 남아 있다. Korea라는 이름으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한 첫 올림픽, 자랑스러운 동메달로 시상대에 태극기를 울린 첫 올림픽, 힘들지만 자랑스러웠던 그 옛날 런던올림픽 선수단의 역사 한쪽에는 뜻밖에도 홍콩의 모습이 남아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2개월여 앞둔 1948년 6월 21일, 삼천만 국민의 염원을 담은 조선 올림픽 선수단은 서울역을 출발하여 부산에서 배를 타고 후쿠오카, 요코하마, 상하이를 거쳐 홍콩에 입성한다. 독립국을 이루지 못한 미군정 치하의 조선은 올림픽 참가 자체가 불투명했지만 체육회의 부단한 노력에 힘입어 IOC의 승인을 받고 출전 자격을 얻게 된다. 하지만 런던으로 갈만한 여비가 부족했던 조선선수단! 넉넉지 못한 주머니 사정은 이들을 홍콩 한인 역사의 한쪽으로 이끌었다.
▴올림픽 선수 환송 기념 서명첩(1948년 7월 3일)
▴1948년 6월 27일 자 동아일보
1948년 6월 27일 자 동아일보는 “세계올림픽 조선대표단 일행은 이십오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이십육일 미국기선 프레지렌트 베이그스 호로 향항(香港)으로 행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후 7월 9일 자 신문에는 ‘삼천만 민족의 여망을 등지고 민족의 제전 세계올림픽대회에 출전하는 조선의 아들들은 그동안 중국 향항(香港)에 대기 중이 든바 육상, 농구의 이십칠 명은 정항범 단장 인솔하에 팔일 경 런던에 도착하였고’라고 적고 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와 수일간 홍콩에 머물던 조선대표단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건 1948년 1월 3일 갓 출범한 새내기 홍콩 한국교민회였다. 당시 이들을 도왔던 홍콩한인회의 한 원로는 “조선대표단은 오랜 시간 머무르며 배 위 갑판에서 축구로 몸을 풀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하며 “멀리서 온 반가운 동포들에게 우리 음식으로 힘을 북돋아 주는 건 교민들로서도 정말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교민들의 따뜻한 환대를 뒤로하고 20여 일간 먼 길을 돌아 런던에 입성한 조선대표단은 어떤 성적을 올렸을까? 역도와 권투에서 분투를 거듭하며 놀랍게도 동메달 두 개를 차지했지만 세계 스포츠의 벽의 수준을 실감하지 못했던 당시 국민들은 이들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안타깝게도 선수단은 고개를 숙인 채 귀국길에 올라야만 했다.
64년 만에 다시 열린 2012년 런던올림픽에 당당한 스포츠 강국이자 경제 강국으로 참가한 대한민국 선수단의 위상을 지켜보노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첫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세계를 향해 자랑스러운 태극 가슴을 내밀었던 그들의 모습에 가슴 한쪽이 아련하다.
참, 당시 조선 최고의 영웅이었던 손기정 선수는 ‘프레지렌트 베이그스 호’를 타고 함께 홍콩을 찾아왔을까? 동아일보의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올림픽 출발 도중 유월 이십사일 차 중에서 급성 맹장염이 발병한 손기정 씨는 이십팔일 귀경하여 자택에서 안정을 취한 후 칠월 십사일 항공편으로 향항(香港)을 거쳐 런던으로 향발하게 되었다.’
배 위에서 축구하는 손기정 선수를 곁에서 보지 못한 향항의 교민들은 얼마나 아쉬웠을까?
<홍콩한인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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