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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영 회장의 생활칼럼 시즌2] 1탄- 고향 이야기(1960년대의 이야기) 위클리홍콩 2022-02-15 14:57:51

칼럼 소개: 지난 회 < 7탄 LG산전 중국 광동성 최초진출 >편을 마지막으로 김운영 회장의 연재 칼럼 [시즌 1]이 마무리됐습니다. 지난 [시즌 1]에서는 홍콩 정착 이후의 창업이야기와 현지언어습득과정 중심으로 연재하였으며 새롭게 시작할 시즌 2부터는 필자의 성장배경과 해외 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중심으로 <고향 이야기>,<시골 촌놈 상경기>, <삼성 그룹 입사기>, <직장 이동 이야기>, <중매일기>, <인도네시아 파견기>,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어려웠던 신혼생활>을 구성하였습니다.   <편집인>



본인의 고향은 유명한 이병주 작가가 재미있게 쓴 '지리산' 소설에 나오는 지역 중의 하나이고, 거창 신원 양민 학살사건이 일어났던 지리산 밑자락 첩첩 산골인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이다. 이 사건은 한국 전쟁 중 낙동강까지 공격해온 인민군들이 미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하여 북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미처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과 남한에서 활동하던 좌익세력이 지리산 부근에 잠입하여 국군에 결사 항전을 벌이던 시절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 당시 본인이 태어나기 전의 고향마을은 낮에는 경찰이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가 밤이 되면 지리산에 은거한 빨치산들이 동네를 습격하여 공산당의 세계로 변하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경찰력으로 치안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해지자 지리산 지역에 은거한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하여 국군을 파견하였고, 고향마을에 진주하였던 국군이 우매한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서 학살한 곳이었다고 어릴 적에 집안 어른들이 이야기해주셨다.


김운영 회장의 가족 산소에서 내려본 신원면 과정리 전경

본인의 종조부(작은할아버지)께서는 양민학살 사건에 대하여 탄원서를 작성하여 대한민국 국회 및 요로에 제출하셨고, 억울하게 국군의 총탄에 맞고 돌아가신 분들을 대신하여 불철주야 명예 회복을 추진하시다가 결과를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1951년 2월 9일에 719명의 양민이 학살된 사건은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만 359명이었다. 유족에 대한 보상법안이 통과된 후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에 대하여 사건 발생 53년 후인 2004년에야 비로소 추모공원이 세워져서 마침내 종조부의 한이 일부라도 풀리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의 공포의 장소로써 사용된 본인이 졸업한 신원국민학교는 그 사건 이후로는 무서운 장소로 알려져 있었고, 이러한 연유로 밤에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학생들이 학교 근처에도 가기 싫어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지로 분류되어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기를 가장 기피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50년대 초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 작전으로 끌려온 이른바 부역자 가족들이 집단 수용소에 갇혀 있는 모습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中

신원 양민학살 추모 기념비

본인이 어릴 때인 1960년대 초에는 산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는 산간 벽촌에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60리 정도 떨어져 있는 읍에서 물건을 팔기 위하여 장사꾼들이 벽촌을 방문하였다. 저녁에 장날이 파하고 읍내로 돌아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의 하나는 전쟁터에서 미군이 사용하였던 고물 트럭이었다. 몇십 미터 낭떠러지의 고산지대에 고도를 무시하고 만들어놓은 군사 작전 도로와 같은 꼬불길이 유일한 도로였고, 비포장으로 몇십 미터마다 비가 와서 패어있는 물구덩이를 지나야 하니 기어서 가는 속도로 트럭이 이동하였다. 또한 모든 화물을 제한 없이 가득 싣고 그 위에 유료로 순서를 간신히 받은 사람들만 탈 수 있었으니 위험천만의 차량 운행이었다. 트럭에는 기사 아저씨 한 분에 조수라는 어린 청년이 꼭 한 명씩 붙어 다녔으며 가끔씩 운행 중 엔진이 원인 모를 이유로 꺼지면 잽싸게 조수가 공구를 들고 차 앞에 있는 엔진 구멍에 넣고 돌리면 몇 번씩의 시도 끝에 엔진이 다시 돌고 차량이 움직일 수 있었다. 60리 길을 오면서 산길이 험한 오르막길에서 움직일 수 없는 순간들이 몇번씩 생기고, 운전기사의 지시로 조수를 포함한 승차했던 승객들이 모두 내려서 산길에서 차량을 밀고 다시 간 적이 태반이었다.

 

중학생 때부터는 읍내로 나와서 거창중학교에 진학하였으며 위로 누이 둘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는 장남이었기에 더욱 책임있게 집안일을 챙겨야 했다. 읍내 중심가에 살았던 우리 집에도 연탄을 아끼기 위하여 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던 신원 시골집에서 장작을 읍내로 날라야 했다. 차가 없는 날에는 쌀과 장작 등을 어깨에 지고 발이 부르트는 줄도 모르고 한없이 몇 시간을 걸어서 읍내로 돌아왔다. 매번 시골에서 출발하여 40리쯤이면 필수적으로 만나는 약 100미터 폭의 영호강을 건너는 일은 만 12살 정도의 어린 나이인 본인에게는 크나큰 도전이었다. 특히 장작과 쌀을 어깨에 진 채로 차디찬 강을 건너면서 누나들과 고모의 손을 잡고 수심이 깊은 곳은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급류의 강물을 건너서 위험천만한 고비를 넘기고 무사히 집에 도착하곤 했었다.


신원 감악산 정상의 선산에서 김운영 회장 조부(좌) 정도경 대표(중앙) 김운영 회장(우)

1960년대 후반의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이 끝나고 아직까지 완전히 복구가 되지 않은 상태였고, 거지들이 거리를 헤매던 세계 최대의 빈곤국이었고, 본인의 고향 신원면은 누구도 상상이 불가한 첩첩 산골이었다.

 

이런 곳에서 태어난 본인이 인도네시아와 싱가폴을 거쳐서 1985년부터 세계의 도시인 홍콩에서 살게 되었으니 촌놈이 엄청 출세한 셈이었다!

 

본인보다도 더욱더 출세한 사람은 사실 가까운 나의 파트너였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의 인제가 고향인 아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우리는 아직도 서로가 둘 중 누가 더 촌사람인지에 대하여 티격태격 중이다.

 

<다음 호 2탄 [시골 촌놈 서울 상경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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